나는 솔직히 더 빨리 달리고 싶다
나는 느리게 걷는 사람이다.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내 또래 아기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까지도 나는 아직 기저귀를 차고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다고 한다.첫돌이 지나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첫걸음을 뗐다.
스무 살 또래들이 한껏 멋을 내고 대학 캠퍼스를 활보할 때, 나는 학원 도서관 책상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수험서를 펼쳤다. 스물두 살의 봄, 다른 이들보다 2년 늦게 캠퍼스 정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나는 느리게 걷고 있다.
같은 나이 또래 친구들이 이미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고 한몫하고 있을 때, 나는 아직도 내 길을 찾고 있다. ‘방황’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긴 시간을 의미하는 줄 몰랐다.
사람들은 말한다. “다 본인만의 속도가 있는 거야.”
고맙지만, 솔직해지자.
“난 빨리 달리고 싶다.”
꽤나 자주 조급해진다. 빨리 걷지 못하는 나 자신이 답답하다.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 출발 신호가 울리고 다른 아이들은 앞으로 나가는데 내 다리만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느낌. 그 답답함을 자주 느낀다.
한번은 공황이 찾아왔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혔다. 마음만큼 빨리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조급함이 밀려올 때마다, 그때의 심장이 요동치는 공포가 다시 찾아온다.
AI가 건네준 위로가 있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위로에 기대고 싶지 않다. 지금 내 앞에 쌓인 현실의 문제들을 무책임하게 외면하고 싶지 않다.
난 빨리 달리고 싶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난 바다거북인지도 모르겠다. 육지에서 토끼들 사이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으니, 내가 느리게 느껴지는것일지도. 어서 내가 헤엄칠 수 있는 바다를 찾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또 질문이 생긴다.
바다에 도착하면 만족할까? 바다에도 송사리도 있고 상어도 있다. 얼마큼 빨리 가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금 느끼는 ‘느림’도 결국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나온 감정이다. 상대적인 느낌일 뿐이다.
문제는 그 기준을 외부에 두면, 내가 어디에 있든 기준이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서울에 살 때는 서울 사람들과 비교하고, 강남에 가면 강남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참에 나만의 기준을 세워보기로 했다.
일단은 경제적 자산을 기준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봤다. 숫자로 된 명확한 목표선. 자세한 내용은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적어뒀다.
결론: 누가 뭐래도 난 여전히 빨리 달리고 싶다.
다만, 조급한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지 않도록 주의 하기.
지금까지 열심히 잘 해왔다는 사실 잊지 말기.
바다를 ‘열심히’ 말고 ‘전략적으로’ 찾아보기.
몸과 마음의 건강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운동, 명상 빼먹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