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가득한 오늘 하루, 영국 날씨는 오늘도 하루종일 흐림.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저주는 어린 나이에 성공하는 것이라 하던가.
고작 30대 중반에 해외지사 주재원장이라면 이 저주에 걸렸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20살 이후로 내 인생은 참 다사다난했다.
20살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수학 선생이었다.
24살, 처음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에 충격을 받아 학원 선생 일을 그만 두고, 필리핀으로 떠나 2달 동안 파견생활을 보냈다.
필리핀에 다녀온 다음 인생에서 한번 쯤은 후회 없이 공부를 해보고 싶어 고시를 준비했다.
28살, 3년의 고시 생활을 마무리한 뒤, 전부터 관심이 있던 무역업으로 취업했다.
이렇게 돌고돌아 무역일에 정착한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영국지사 주재원장이 되어 신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5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승진했고, 조금 더 많은 경험과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겠지.
남들보다 조금 빨랐지만, 딱히 내가 지나온 길이 정답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운좋게 남들보다 조금 빨리, 아주 조금 높은 곳에 올라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그건 여러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내게 운좋게 기회가 주어진 것일 뿐.
그동안 난 그저 내 앞에 놓인 여러선택지 중에서 가장 잘못된 오답만을 피해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판단은 복잡해지고 내려야할 결정은 어려워진다.
신입사원 때에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사장 입에서 "글쎄요" 내지 "그렇지 않을까요"라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내게 원하는 것은 상황을 종합해서 내린 "판단"과 그 판단에 근거한 "결정"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다름 사람 앞에서 질문을 하는 날보다 판단고 결정을 내려주는 날이 늘어나고, 그런 판단과 결정이 쌓이는 가운데 그 사람들은 내게서 "독선"과 "거만"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누가 뭐라하건 이곳 책임자는 나다.
지사 사업이 망하면 내가 가장 큰 책임을 질 것이고,
내 독선과 거만을 비난하던 다른이들은 내 실패를 비웃겠지.
그런데 그들 말들을 내가 다 듣고 따라주면 실패의 순간에 그들은 나와 함께 책임을 질까?
모든 책임을 지고 나왔으니, 온전히 내가 판단하는 것일 뿐.
책임을 질 의무가 없는 자의 의견엔 무게가 없다.
실패했을 경우 쏟아져내릴 비난의 폭풍에서 벗어난 자는 상황을 관망할 뿐이다.
결국, 이 폭풍에 찢겨나가며 생존 싸움을 할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 상황에 맞춰 행동해야지.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이 폭풍속에서 정작 내가 찢겨져버리면 계획은 달성할 수 없고, 엉망인 계획이라도 일단 이번 폭풍을 내가 버텨낸다면 다음 기회가 오는 법이니까.
내가 언제까지 남들보다 앞서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당장, 내일 이 회사에서 나에게 권고 사직을 할 수도 있는 일이고,
영국 시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좌천될 수도 있으며,
사내 정치에 밀려 나 스스로가 때려칠 수도 있으니까.
그 이후에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아니면 그대로 무너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과거로 되돌아간다하여도 난 당시 내가 했던 판단을 다시금 할 것이라 믿는다.
백 번을, 천 번을 다시 돌아간다 하여도, 난 다시 같은 결정을 내리고 같은 파멸의 길을 걷겠다.
이 판단과 결정들이 날 파멸로 이끌지언정, 내 판단에 따른 결과가 틀리진 않았으니,
날 파멸로 몰아놓는건 내 판단과 결정이 아닌, 너희들의 시기심과 질투일테니까.
그러니, 남들이 내게 독선과 거만을 비난하더라도 난 나의 길을 걸어야겠다.
남들 눈에 비춰지는 독선과 거만이 나를 파멸로 이끌지언정, 내가 주재원장으로써 내리는 판단들은 옳은 결정들이 되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