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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May 19. 2023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는걸요

Lake Titicaca, Bolivia

'큰일 났다. 이 상황을 어떡하지?'

화장실에서 터진 비상사태에 한순간 사색이 되었다. 머릿속에선 삐용삐용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지금 섬에 들어와 있고, 짐은 섬 밖의 여행사에 맡겨두었고, 달랑 메고 온 배낭을 제외한 모든 짐은 그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예상일보다 한참을 일찍 시작된 여자의 그날에 이렇게 절망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이걸 진짜 어쩌지.

버스로 한나절을 꼬박 달려 도착한 코파카바나에서 그냥 지나치면 섭하다는 '태양의 섬(Isla del Sol)'. 곧장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로 넘어갈까? 싶었지만 이왕 가볼 수 있는 곳은 다 가보리라 다짐한 시간 많은 여행자는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오롯이 혼자가 된 순간. 혼자였던 시간보다 누군가가 옆자리를 채운 시간이 더 많았기에 홀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다렸을 만큼 마음은 언제나 준비 만만이었다.


자그마한 통통배로 1시간가량 호수를 가로질러서야 도착한 섬에서 또다시 마주한 어마무시한 돌무더기. 와, 또야? 이 여행의 목적이 트레킹 순례가 아닐까 헷갈려오기 시작했다. 하필 예약한 호스텔은 선착장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기에, 어차피 올라야 한다면 부지런히 움직이자. 이제 이 정도는 거뜬하잖아…!

일사천리로 호스텔의 체크인까지 마친 후 산책 겸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태양의 섬이라는 빛나는 이름만큼이나 햇살이 잔뜩 쏟아지는 곳이다. 선글라스를 챙겨 오지 않았다면 눈을 잔뜩 찌푸리며 다녀야 할지도 모를 만큼.


다만 누군가와 스칠 법도 한데, 마을 주민이든 여행객이든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아니었다. 한창 사람들로 북적이던 쿠스코에서 넘어온 탓인지 낮의 고요함이 어색하게 다가올 정도로. '저기요, 어디로 가야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나요?' 하며 말 붙일 이가 없다는 적적함이 내 나침반의 방향을 잃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가 쉬는 게 좋겠다.

이제 온수는 기대조차 않게 된 나는야 강한 여행자! 점점 단련되고 있는 듯한 느낌은 기분 탓일까? 후다닥 냉수마찰 샤워를 하고 침대에 엎어지려는 순간, 아랫배에서부터 싸한 느낌이 타고 올라왔다. 이게 무슨 신호인지는 직감적으로 알았으나 마음은 세차게 부정하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해.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짧은 시간 미친 듯이 늘어난 활동량 때문이었을지, 고산지대에 적응하기 위해 생체리듬이 바뀐 건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달력에 표시해 둔 날짜보다는 훨씬 앞당겨졌다는 건 확실했다. 아니 왜? 하필 지금?? 거짓말이지???


다행인 건 내 배낭 안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챙겨놓은 위생용품이 있었다는 것이고, 불행인 건 살살 아파오는 아랫배에 대처할 수 있는 진통제가 없다는 점이다. 아. 섬 밖의 나의 짐에 파묻혀 있을 비상약 상자가 몹시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당장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마에 내 천자가 저절로 쓰이고 있다는 것뿐.

일단은 내일 아침 일찍이 움직여 섬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급격한 피로감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슬슬 눈이 감겨올 때 즈음 갑자기 문밖에서 컹컹! 컹! 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때에 공포스러운 사운드까지 더해지니 나도 모르게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슬금슬금 창문 너머로 비치는 달빛을 조명 삼아 훑어보니 웬걸. 동키 한 마리가 달빛 아래에서 컹컹대며 울고 있는 애처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하필 달빛이 동키 쪽으로 밝게 비쳐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경계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경계경보 3단계에서 1단계로 내려가는 순간.

터덜터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이 동키, 아무래도 야행성이었나 봐. 새벽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울어대는 탓에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났다.


혼자가 되자마자 마주한 모든 일들이 서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누가 등 떠밀어 남미로 떠나온 것이 아닌데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을 쏟아내고 싶었다.

전기장판을 뜨끈뜨끈하게 틀고, 치킨이나 뜯으며 적당히 재미난 예능을 보다가 푸지게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남미. 당장 실현 불가능한 꿈에 마음은 더 먹먹해지기만 한다. 한국을 떠나온 이래로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밤이었다. 쿨찌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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