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체고 / 비가열압착치즈] 한남동의 돈키호테 치즈플로
저는 치즈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반응이 대부분 비슷하다. 먹는 그 치즈를 말하는 것이 맞냐라고 묻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눈빛을 몇 초 보낸 후에 더 이상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이 이어지기도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치즈가 그저 매운 음식에 곁들여 먹는 정도의 모차렐라 정도가 익숙할 뿐 그 이상의 관심도, 흥미도 없는 주제다.
2년인가 3년 전쯤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공연을 보고 친구와 간단히 와인을 마시기 위해 검색하던 중 알게 된 곳이 치즈플로다. 가게 이름부터 이미 고민할 것도 없이 '여기다' 하고 들어갔지만 이미 영업시간이 길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른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이 일키아쏘 인데 이곳도 너무 훌륭해서 꼭 한번 글을 써볼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이후 치즈플로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유럽 여행 중 난생처음 보았던 치즈샵의 대형 진열대가 그곳에 있었고 나는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런던에서 꼭 가봐야 한다던 닐스야드 데어리나 파리의 소규모 치즈샵들에서는 문을 열자마자 어디서도 맡아볼 수 없었던 저 깊은 숙성의 냄새가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치즈의 본고장 유럽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쿰쿰한 분위기조차 낭만적이었다. 치즈 덩어리들은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가게 이곳저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치즈 휠이 통째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친절한 직원들은 모든 치즈를 조각으로 썰어 원하는 대로 맛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치즈를 고르고 나면 정육점처럼 저울에 달아 원하는 양만큼 눈앞에서 치즈를 썰기 시작한다. 도구도 제각각에 그 당시 처음 보는 나이프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언젠가는 내 집에 들이리라는 생각과 함께 눈은 직원들의 손을 쫓기 바빴다. 다 썰고 난 치즈는 유산지 같은 종이에 정성스레 포장된다. 그 치즈가 손가락 두 개 정도의 정말 작은 양일지라도 포장지를 근사하게 접어냈는데, 그때 내 기분은 마치 어린 시절 두툼한 손으로 선물포장을 척척해내는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를 경이롭게 바라보던 그 느낌이었다. 진공포장이나 플라스틱이 아닌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질감, 비닐봉지가 아닌 크래프트 봉투에 무심히 담아주는 치즈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경험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정확히 박제되어 있다. 유럽에 또 가야지만 할 수 있는 경험일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한남동 골목에 그렇게 치즈플로가 있었다.
몇 번의 클래스에 참여하고 나는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치즈플로에 종종 들렀다. 회사에서 견학차 방문했던 주류박람회에 치즈플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마치 내 가게라도 되는 듯 회사 사람들을 데려가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사장님과 서서 나누는 대화는 항상 반갑고 따뜻하다. 더불어 사장님은 언제나 공부하고 정진하고 도전하신다. 사실 나는 치즈플로의 치즈가 아니라 그런 사장님의 모습이 좋아 계속 맴돌 수도 있다. 사장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셰프님이 진열대에 나오셔서 직접 치즈를 포장해주시거나 설명을 덧붙여 주신다. 셰프님은 사장님과는 다르게 조금 더 진지하고 한 가지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몰두하신다. 나는 그 모습에서 얼마나 그분이 이 일에 대해 진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여느 다른 음식들처럼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치즈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치즈플로의 트리플 크림 브리, 부라타는 내가 여태껏 먹어본 아티장 치즈 중에 단연 최고다. 트리플 크림 브리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크림의 풍미가 엄청난데, 트리플이 아닌 콰트로급이다. 그래서 부라타처럼 단독으로 먹기는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크래커나 바게트와 함께 곁들여 먹으면 버터와 과일잼을 더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게 치즈플로의 체다 커드. 이 체다 커드는 한 입 크기로 불규칙하게 커팅되어있다. 새콤한 맛보다 담백한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요거트를 응고시켜 놓은 맛이다. 체다커드는 처음 시도한다면 찐 감자와 함께 살짝 구워내 먹어보길 추천한다. 고구마와 신 김치의 조합을 능가하는 환상의 콤비네이션이다.
매번 그날 만든 치즈를 사 가기 바빠 미처 다른 치즈에 대해 통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사장님이 유일하게 계속해서 들이는 치즈라며 어느 날 추천을 해주셨다. 만체고는 스페인 라만차에서 이름을 딴 양젖 치즈다. 경성 치즈지만 에멘탈 치즈보다는 쫀득함이 덜하고 수분기가 없어 씹는 순간 입안에서 잘게 부서진다. 마치 마요네즈가 가미된 것이라 착각할 만큼 다른 치즈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처음에는 집에 남아있는 와인과 함께 먹어볼까 하고 한 조각 잘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와인은 그대로고 그 자리에서 거의 사온 치즈의 1/2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사진도 없다..)
치즈도 점차 사람들의 취향의 한구석에 자리하려고 하는지, 그 이후 몇 곳의 가게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군데 방문을 해 봤는데 대량생산이 힘들고, 레스토랑처럼 테이블을 늘려 운영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직까지 한계가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혹시나 다음번에 왔을 때 사라져 있을까 봐, 나는 괜스레 이리저리 질문을 하고 애초에 계획했던 예산보다 항상 초과하여 한가득 사들고 가게를 나오게 된다. 낙농업 불모지인 한국에서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술을 배우고, 혹은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자신을 믿고 치즈를 믿고 월급을 받는 대신 월세를 내는 처지가 되어 세상에 치즈를 내놓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돈키호테를 완역한 안영옥 교수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완벽한 작업을 위해 스페인 라만차에 직접 답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돈키호테 번역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더니, 할머니가 자신 주변의 몇 사람을 소개해주며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도 돈키호테고, 저 사람도 돈키호테야. 맨날 꿈만 꾸고 살아"
한해 한해 지날수록 꿈이라는 것이 나에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사무실에 앉아 신문기사를 보다가도,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도 수백 번 내 마음을 저울질하는데 생각이 현실의 벽까지 기어코 찾아가 무릎을 꿇으려 할 때면 한없이 울적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스레 이곳저곳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돈키호테들을 주위를 맴돌며 치즈와 함께 느긋한 위로를 받는다.
꿈을 묻는 것이 낭만이 된 시대, 그래도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