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창작의욕을 높이는 방법 중에 경연대회가 있다. 가장 우수한 것으로 선택된 작품의 작가에게 상장 혹은 상품을 주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한 고객이 이러저러한 작품을 이런 가격으로 원하니 한번 만들어 보라”는 식의 경연대회이다. 학기 중 하나의 Project로서 이러한 경연대회가 있었다. 내 학우들이 교실에 다 모였다. 그리고 Client 한 분이 들어왔다. 대학의 Director(대학교 교장)였다.
“내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목걸이를 선물할 예정입니다. 지출 예산은 000달러 정도입니다. 내 취미는….. 아내 취미는…. 가족은…. 그리고 아내는 조용한 성격입니다. 아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자 합니다.”
교장의 일반적인 설명을 듣고 학생들의 개별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색깔은? 나이는? 평소 착용하는 액세서리는? 등등 교장과 학생 간의 딱딱한 분위기가 아닌 Artist와 Client 사이로서 아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사실 학생은 교수 혹은 교장을 자주 만나며 서로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여기 학교에서의 일반적 생활이었다.
1시간의 토의가 끝나고 Project 담당 교수의 추가 설명이 더해졌다. 3주 후 이 시간 이 방에 모든 작품이 출품되어야 하고, 그때 Client인 Director 혼자 이 방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며, 의뢰인 이외의 생각은 완전히 배제되는 방식이었다.
우선 의뢰인의 성향과 의도를 잘 알아야만 했다. 보통 보편적인 캐나인들은 이런 종류의 액세서리를 매우 좋아한다. 어느 정도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예술대학교의 교장이니 예술에 대한 안목이 좀 더 특별할 것이다.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작업실로 돌아와서 한 순간 떠오르는 생각으로 단시간에 개괄적인 디자인을 마쳤다. 많이 고민하고 많은 사례를 뒤져 본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럴수록 작품은 자꾸 Stereo 타입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주 후 발표하는 날, 나는 내 방에서 다른 작업을 하며 발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개별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고 선택되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자기만의 특색과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성, 질(Quality), 그리고 가격 등등 모든 조건이 가장 좋으면서 의뢰인의 호감과 일치가 되어야 했다. 무엇이 선택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얽매이기 싫어서 나는 그 시간에 다른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동료 학생이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Hi Yeon, Congratulation”
참가자, 선배, 후배, 그리고 교수들 모두 그 방으로 모였다. 자기 작품 소개와 간단한 품평회가 끝나자 서로서로 찬사가 이어졌다.
“모든 작품은 정말 최고이고 위대하다. 의뢰인이 좋아하는 하나가 선택되었을 뿐이다.”
주임교수의 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내 아들 나이의 동료들의 작품이다. 나는 그 나이에 지구가 둥근지도 모르고 부모 돈으로 술만 마시고 돌아다녔다. 밤늦게 작업한 어린 그들이 만든 작품이 당연 최고야. 단지 내 것은 바로 주인을 만났다는 것만 다를 뿐이야”
내 작품은 그때 바로 Director의 품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교장으로부터 직접 대금을 받았다.
하나의 볼륨이 주인을 만나 내 곁을 떠났다. 그러나 내 머리에서는 그 볼륨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른 하나를 더 만들고 싶었다. 내 옆에 남아 줄 그것과 비슷한 아름다움을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느낌이지만 다른 형태의 목걸이를 디자인했다. 그것은 다양한 크기의 볼륨이 연결된 것이었다. 몇 번의 전시회에 진열된 후 내 설랍과 주임교수 설랍에서 3년 동안 잠을 잤다.
내가 대학에서 작업을 할 때 내 작업 칸 건너편에 내 나이 또래 여자분이 있었다. 파트타임(part time)의 학생이었고 직장인으로 은퇴를 하고 금속공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매장인 Canadian Tire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고 가끔 포옹도 해 주었다. 내 작품에는 언제나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항상 미소를 지었고 부드럽고 다정스러웠다. 옷차림은 귀 띠가 났고 얼굴은 아름다웠다.
어느 날 그녀가 자기 귀중품을 보여 주겠노라 하면서 나를 불렸다. 해외여행 때 남편이 사준 반지와 팔찌, 그리고 목걸이였다. 다이아몬드는 내 눈으로는 처음 보는 크기였고 팔찌와 목걸이도 역시 내가 처음 보는 스타일의 고급품이었다. 돌 하나 박히지 않았는데, 팔찌 하나가 수백만 원이라 하니 많이 놀랐다. John Hardy 제품이었다. 그 회사의 제품과 역사를 온라인으로 알아보고는 나는 바로 메니어가 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그녀는 가끔 농담으로 나를 John Hardy로 부르곤 했다.
대학을 마치는 마지막 학기 초여름에 그녀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주임교수와 담임교수 둘,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넷이었다. 그녀의 집은 Saint John River를 끼고 있었고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입구 홀부터 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우리를 환영했고 남편의 시중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다. 가벼운 차림으로 야간에 야외 발코니에서 오래 있으니 한기를 느꼈다. 쌀쌀한 여름밤에 술을 마시면서 야외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그렇게 야릇하고, 타오르는 장작불이 그렇게 따스할 줄을 이때 알았다. 눈치를 챈 그녀의 남편은 열심히 장작을 넣어주었다. 술과 사람, 장작 타는 소리와 따스함이 함께 어울려지는 낮과 밤이었다.
한국으로 귀국할 때였다.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파티 한번 더 해 줄 거요?”
“물론이지”
그녀의 상쾌한 말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Graduate Program을 위해 다시 Fredericton으로 돌아왔다. X-Mass가 다가올 무렵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갑자기 그 목걸이를 원했다. 남편이 해주는 X-Mass 선물로 내가 만든 그 목걸이를 선택했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 목걸이를 Gallery에 전해준 상태였다. 얼른 Gallery로 달려가서 그것만 살짝 빼내어서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따뜻한 관심과 다정스러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에게 높은 가격을 부를 용기가 없었다. 그 대신 다음 파티에는 따스한 장작불을 쬐며 정말로 취하고 싶을 정도로 마시고 와야지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녀는 5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때 나는 Graduate Program을 졸업하였다. 졸업복을 입고 시가행진을 할 때 그녀와 나는 카메라 앞에 특별히 함께 포즈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