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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나미 Nov 02. 2016

일도 궁합이 있다

2016년 생일을 보내며





하고 싶은 일이란 게 무엇일까.

왜 그것이 중요할까.



졸업을 미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이 잘 안 풀렸다.

근 10개월을 스스로 만든 고통의 시간에 빠져있었고, 앞 날이 캄캄하기만 해서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제발 어디서든 연락이 와라. 

간절히 바라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인생 한편을 자리 잡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업종에 취업이 되었다.

의류 판매직.

난생처음 입사를 하고 근 3 주간 겪은 솔직한 심정은 이랬다.


이거 너무 쉬운데? 내 천직을 발견한 건가?


그럴만했다.

이제 겨우 입사한 사람에게 무슨 큰 일을 부여하겠으며,

승진할수록 워낙 체력 소모가 심하다 보니 입사 초반에는 옷 접기, 인사하기 같은 단순 업무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1년이 다되어 갈 때쯤 명확하게 알았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을 만나기 때문에 감정노동이 심한 직업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몸을 혹사시키며 일을 하다 보니 체력은 바닥이고

매일매일 실적을 내야 하며

무엇보다 일을 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저 한 달이 지나면 월급이 들어오고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힘들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어디든 불러주시면 회사에 뼈를 묻을 때까지 기꺼이 일하겠습니다

했던 내가 감히.



일도 자기랑 맞는 궁합이 있다.



 

그나마 그곳에 있을 때 즐거웠던 점은

글로벌 기업이다 보니 해외에서 DP 담당 (의류 전시) 팀이 오면 그들이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게 신기했고,

그들과 한 번씩 외국어를 쓰는 게 좋았고,

외국인 고객이 오면 같이 이야기하는 게 신났으며,

본사인 스페인에서 오는 스페인어 메일을 확인하고, 

본사와 스페인어로 직접 통화하는 게 두근두근 했다. (신입에게 그런 기회를 준 매니저님께 감사를)


그렇다.

난 외국어를 쓰면서 일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멕시칸에게 스페인어를 쓰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학생은 이제 겨우 두 명.

딱히 수입이라고 말할 게 없을 정도지만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고생했던 지난 시간보다 훨씬 즐겁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왕이면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아마 나도 모르게 학생 때부터 이것저것 부딪치면서 나랑 맞는 궁합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공연 봉사활동, 아르바이트, 학과 일 등을 하면서 너무 지쳤었고

지도 교수님께 토로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나랑 맞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생각했던 게 아니에요.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A4용지를 꺼내시며 하신 말씀이 아직까지 와 닿는다.




ㅇㅇ 아, 지금 너는 이 백지처럼 아직 아무것도 없어. 

대신 여기에 네가 해왔던 것들을 써온 거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걸 써 내려갈 거야.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지우자.

시간이 지나면 지우고 남은 게 보일 거야. 그럼 그걸 해내가면 돼. 





그 후 나의 종이에는 공연 기획, 무역인, 쇼핑센터 기획자, 상품 MD 등이 있었다.

막연하게 꿈꿨던 것들과 열심히 노력했지만 되지 않은 것들을 지우고 나니

언어 교육, 영상 번역가, 작가가 남아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계속 다른 길에 미련만 가지던 그때가 있었기에 현재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앞으로 나의 종이에 남은 것들로 다가올 5년을 나만의 것으로 예쁘게 꾸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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