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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Oct 27. 2016

#12. 취업난에 빠진 나르시시스트

한국의 청년들이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모든 청년들의 경험이 다르기에 단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공감하는 좌절의 시기가 있다. 바로 취업 준비생 시절이다. 사상 초유의 청년 실업률은 자의든 타의든 젊은이의 자신감을 앗아가는 커다란 요인이다. 토익 고득점자가 이렇게나 많았고, 봉사활동을 다니는 훈훈한 청년들이 저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한 번 좌절, 쓸 말 없는 자기소개서와 텅텅 빈 자격증 란을 보고 두 번 좌절, 모든 지원자들을 모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불합격 통보에 세 번 좌절, 여차여차 올라간 면접에서 터진 횡설수설에 네 번 좌절, 엄마 친구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에 다섯 번 좌절, 그야말로 좌절의 시기이다.


  이렇게 본다면 취업 준비생에게 자기애(自己愛)는 과분한 것 같다.

도저히 자신을 사랑할 일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일이 부족하다. 아마도 이전부터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지 않냐?, 라고 친구들에게 묻는 자신감 정도는 있었을 테니까.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이 바람 앞의 촛불이겠지만. “꺼져.”


  문제는 좌절의 악순환이다. 좌절감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우울함은 나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떨어진 자신감은 내 취업을 방해하고, 그러면 또다시 좌절하고.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좌절에서 회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애를 되찾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기는 절대 쉽지 않지만 말이다.




자신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버전에 따라서 세세한 차이가 있지만,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틀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자리에 수선화(Narcissus) 한 송이가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그리스 신화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꽤나 매력적이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격렬한 사랑을 느꼈지만, 입을 맞추고 포옹할 수 없어서 절망한 남자라니. 차라리 크리스마스이브에 코트 주머니 안에서 여자 친구의 손을 맞잡고 목도리를 함께 두르며 평소에는 시도도 못해볼 고급스러운 식당을 예약해서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가능성 있었을 텐데...


이후 정신분석학자들은 나르키소스의 이런 욕망에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기애를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란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데 나르시시즘은 전문적 영역을 넘어서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성향.  


  실제로 자기애가 없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나르키소스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에 대한 애정이 샘솟을 수 있다. 자기애를 규정하는 것은 외모만이 아니라 능력이나 성품과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자기애가 없는 사람은 불행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우울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타인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물론 병적으로 심각한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면, 그 사람 역시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생각만 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말 그대로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라니. 심지어 타인은 동의하지도 않는 자기만의 착각에 빠진 인간이라면... 윽, 별로다.




  나 역시도 나르시시스트다.


아무리 예쁨 받기 어려운 백수라지만, 그래도 하나 정도는 괜찮은 면이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심장 판막이 예쁘다던가, 콩팥이 앙증맞다던가, 뇌에 주름이 없어 반질반질하다던가.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너무 슬프니까. 자기 방어적 기제로서 나르시시즘 정도는 작동하고 있다.


최근 나를 자기애로 빠뜨린 건 수영이다. 물에 잘 뜨면 뜰수록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만드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어쩐지 수영복을 입은 비루한 내 몸도 뿌연 샤워실 거울 앞에서는 섹시하게 느껴지는 마법 같은 환상이 펼쳐진다.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에서 박태환이 냈던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내 안 계신 나르키소스님의 은덕이다.


다행인 건 이 증상이 더 심각해질 일은 없다는 것이다. 수영을 배울수록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가늠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시 31살 수영 신동인가!, 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했다. 0점에서 성적을 올리는 게 얼마나 쉬운지 망각한 채로 말이다. 강사님의 칭찬도 한몫했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을 나같이 소박한 사람에게 계속했으니 오죽했겠는가. 나를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주변 환경이었다. 아침 수영장에 대거 포진한 중년 아주머니들에 비해 습득이 빨랐던 것이다. 중년 아주머니와 달리기 시합에서 이겼다고 우사인 볼트라도 된 듯 착각한 그런 상황.




처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석사까지 했는데 나를 써주는 곳 하나쯤은 있겠지. 허투루 공부하지도 않았고 나름 건실하게 살아왔는데. 하지만 취업의 문턱은 착각에 빠진 나르시시스트를 통과시켜줄 만큼 자애롭지 않았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수영이 주는 자기-만족감이 구직의 좌절에서 나를 끌어내 준다는 사실이다. 만약 수영을 하지 않았다면 수시로 전달되는 불합격 통보를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또다시 불합격 통보가 전해질 수 있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자기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며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최고의 해결책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취미로 수영을 즐기는 것이지만.          

  

병리학적 접근이 필요한 나르시시즘이 있다. 그건 분명 지양해야 할 상태이고, 의사들의 진단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취업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년들에게는 다른 진단이 필요하다.


자기 안의 나르키소스를 키우는 것이다.


현 대한민국에서 나르키소스가 구직을 했다면, 수면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취업에 대한 좌절감으로 물속에 뛰어들었을 테니까. 그 정도로 자기애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니까.


  자기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할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알고 있다면 헤매지 않을 테니까. 정 견딜 수 없다면 비록 환상이지만 수면에 비친 자신이라도 사랑할 수밖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든 취업난에서 허우적거리든 숨이 막히는 건 매한가지니까, 그나마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환상이라도 붙잡을 수밖에. 그럼 그 자리에 수선화 한 송이 정도는 피어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계속되는 서류 탈락으로 실망한 나르시시스트가 오랜만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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