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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Nov 17. 2016

#13. 면접비가 상징하는 것

회사를 선택하는 한 가지 기준

현금 2만 원과 만 원이 충전된 스타벅스 카드, 그리고 편지 한 장. 


면접장을 나오면서 받은 봉투에 들어있던 것들이다. 흔히 말하는 ‘면접비’였다. 시선을 끌었던 것은 액수보다 편지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면접에 참여해준 지원자들에게 표하는 고마움, 면접으로 인해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이라며 동봉해준 스타벅스 카드, 합격여부에 상관없이 지원자의 앞날을 격려하는 말, 편지에는 그런 것들이 담겨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별 것인,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사측의 준비물이었다. 작은 부분에서도 지원자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그런 준비물.      


면접에 합격한다면 그 무엇보다 좋겠지만, 합격여부를 떠나 이런 봉투를 받는 것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면접비는 지원자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대우한다는 사측의 입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이 땅의 청년 구직자들에게 이런 관심은 마음에 작은 물결을 일으킬 테니까. 비록 그것이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회사의 전략일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전략을 구상한 사원에게 포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지원자에 대한 표면적인 배려를 통해 회사의 이미지를 한껏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구직자마다 회사를 정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 흔하게는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이 기준일 수 있고, 회사의 평판과 유명세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연봉을 중시할 수도 있다. 평생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소시민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도 별로 없을 테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의 연봉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목표를 크게 잡는 건 괜찮은 방법일지 모른다. 뭐, 꿈이 크면 깨어진 조각도 크다고 하지 않은가. 고3 때 공부도 안 하는 반 아이들에게 꿈이라도 크게 가지라며 담임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당시 서울대를 갈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며 그에 맞춰 사탐을 선택했었다. 심지어 제2외국어도 준비했다. 물론 주요 과목의 성적을 봤을 때, 그건 꿈이 아니라 망상이었지만... 


나에게도 회사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주체적으로 회사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취업난의 풍파를 겪으면 겪을수록 이런 희망사항은 점차 사라지고, 제발 저를 쓰기만 해주세요!, 라며 호소하게 될 날이 오겠지만. 현실과 이상의 타협점을 찾는 것은 그래서 구직활동에 매우 중요한 결정인 것 같다.     


나에게 회사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두 가지이다. 철학이라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곳, 그리고 사원 복지에 신경 쓰는 곳이다.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을 살리는 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관심도 없는 일을 한다는 건 정말 곤욕이고, 그렇다면 삶에 대한 목적의식을 갖기도 어려울 테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방향을 잃고, 일은 그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노동으로부터 평생 자유로울 수 없는 대다수의 인간에게 그보다 서글픈 일도 없을 것이다. 자기실현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일로부터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을 산다면 말이다.      




나에게 일에 대한 흥미만큼 중요한 조건이 사원에 대한 복지이다. 복지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야근이 없다거나, 연차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거나, 문화 생활비를 지원한다거나, 명절에 수당이나 선물을 준다거나 등등. 또는 사내에서 카페를 운영하거나, 운동 시절이 있다거나, 잠시 눈을 감고 있을 수 있는 휴식공간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 그중에서 최고의 복지는 슬프지만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거나 자유로운 연차 사용을 꼽는 것 같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당연한 근로자의 권리가 사측의 배려와 선심으로 포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반복적으로 눈에 띄는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회사가 내걸고 있는 복리후생에 대한 조건들이다. 야근 강요 안 함, 회식 강요 안 함, 4대 보험, 퇴직금, 정기 휴가 등등. 이런 조건을 내걸고 있는 회사를 찾을 때면, 복지가 좋은데?, 하고 놀라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이 내걸고 있는 복리후생의 대부분이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본적인 근로자의 권리도 지켜주지 않은 회사가 많다는 것. 우리가 듣고, 느끼고, 경험해서 익히 알고 있듯이 이런 뒤틀린 현실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사회 풍토가 만연하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이런 현실에 격렬히 저항하고 싶지만, 오늘만은 내가 참는다며 현실에 순응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일단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상황이 되어야 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는 취준생이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처럼 행동하길 기대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모습이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에 가까운 것 같다. 백수라면 포만감에 만족하기보다는 항상 부족한 무언가를 갈구할 테니까. 더구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시기이기에 소크라테스에 가깝기도 하다. 물론 그 생각은 온갖 망상에 가깝겠지만.      


현실과 개인적인 이상의 타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목적이 정의구현이 아니라 취업이라면 말이다. 물론 결국에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근로조건이 형성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바람은 아직 먼 이야기인 것 같다.     




그 회사가 사원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다양한 정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중 각 회사의 홈페이지는 구직자가 가장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사원의 복지를 회사의 홍보에 내거는 곳은 생각보다 드물다. 홈페이지의 대부분이 그 회사가 만드는 상품에 대한 홍보이거나, 다소 공허해 보이는 목표나 인재상을 주장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업의 기본적인 목표는 고객에게 더 많은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물론 어떤 회사가 대대적으로 복지 혜택을 홍보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순진한 처사일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실상을 알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회사가 사원 복지에 신경을 쓰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면 작은 기대를 걸어볼 수 있다. 적어도 그곳은 물건만 파는 기업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원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 있으니까.      


비록 아직 자리도 못 잡은 백수이지만 앞으로의 삶을 회사의 부품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더 존엄한 인간의 삶을 위해,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열심히 구직활동에 나서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우리’를 생각해주는 회사를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구직자가 요구해도 될 기본적인 조건이 아닐지. 혹시나 아직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인간이라고, 그리고 당신의 삶도 대우받을 가치가 있다고.       


면접비 봉투에 담긴 것은 금액이 아니라 구직자라는 인간에 대한 배려라고.      




면접비에 동봉된 편지를 읽고 기분이 좋아진 구직자는 그날 친구를 만나 칼국수 두 그릇과 해물파전을 먹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2만 원을 사용했다. 그리고 함께 스타벅스로 가서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와 블랙티 레모네이드 피지오를 마시고 스타벅스 카드에 충전된 만 원을 사용했다. 면접비 봉투에 들어있던 모든 금액을 딱 맞게 사용했고, 편지에 적힌 글귀처럼 면접으로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였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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