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모 아니면 도, 같음 아니면 다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 리뷰를 쓸 때까지 두 가지 의문이 해결 되지를 않았습니다. 먼저,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한 여인은 빗속을 해치며 차를 운전해 어떤 들판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 있는 두 마리의 동물 중 (아마도 말?) 한 마리를 총으로 쏴서 죽입니다. 그 후 영화는 장면의 전환과 함께 별다른 설명 없이 주인공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인은 누구이고, 그녀는 왜 그 동물을 쏴 죽인 걸까요?
또 다른 의문은 영화의 제목입니다. 사실상, 제가 이 영화를 보게 만든 이유의 팔 할은 제목이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대략적 줄거리를 들었을 때, 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건, 주인공이 자신이 변할 동물로 랍스터를 선택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랍스터인지 궁금했죠. 그 이유는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의 입을 통해 직접 말해집니다. 대략 네 가지의 이유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1) 랍스터는 100년 가까이 살고, (2) 평생 동안 번식하며, (3) 귀족처럼 푸른색 피를 가졌고, (4) 주인공이 어릴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는 것. 그런데 이런 이유들이 영화의 줄거리 또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줄거리 소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화는 크게 두 장소에서 전개됩니다. 하나는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버리는 호텔, 그리고 호텔로부터 도망쳐 나온 인간들이 솔로로 살기 위해 집단을 이루고 있는 숲입니다. 두 장소는 인간 삶의 두 극단을 형상화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억지로라도 자신의 반려자를 찾아야 하는 강요된 삶과 그 강요를 벗어나다 못해 자신을 또 다른 극단으로 몰아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홀로 살아가는 삶. 영화는 초반부터 이런 극단을 사소한 예시로 보여줍니다. 주인공이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행해지는 몇 가지 질문이 그것이죠. 성적 취향은 이성애자 아니면 동성애자를 선택해야 하며, 양성애자는 배제됩니다. 신발 사이즈 역시 240mm나 250mm만 있을 뿐, 245mm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영화에서 신발 사이즈는 외국의 단위를 기준으로 나옵니다).
주인공은 이런 양극단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호텔로부터 도망칠 뿐만 아니라 숲의 삶으로부터도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때 두 삶은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닮아 있습니다. 그것들 모두가 인간적인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타인의 의지로 인해 강요되고 계산된 사랑, 그리고 역으로 사랑과 타인으로부터 배제된 고립된 삶, 무엇 하나도 '인간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인간적이란 말 자체를 흔들고 의문시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영화 말미에서 스스로가 선택한 자신의 반려자와 함께 두 극단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합니다.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아마도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의 논의를 <더 랍스터>라는 영화의 제목과 연결해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랍스터는 ‘평생 동안 번식을 하면서도 (귀족처럼) 고귀한 존재’로 상징화된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반려자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보와 랍스터의 삶이 어느 정도 닮아있지 않을까요? 물론, 끼워 맞추기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해석보다 저에게 더 흥미로웠던 점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의 조건으로서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호텔에서 맺어지는 커플들은 모두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커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주인공의 친구 커플, 노래를 좋아하는 관리자 커플, 기타를 함께 연주하는 숲의 대장의 부모, 그리고 호텔에서 주인공이 만나 잠시 함께 했던 냉혈한 여인 등등. 이후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이유 역시 유사성이나 동일성에 근거합니다. 바로 둘 다 근시라는 점이지요. 주인공을 매혹한 것은 바로 ‘자신과의’ 그 ‘사소한’ 유사성입니다(여주인공에게 토끼를 주던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근시냐고 다그치는 장면은 다소 우스우면서도 그 세계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호텔에서의 삶은 상대방의 특징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거짓과 다르지 않습니다. 코피라는 특징을 위해 매 순간 부딪혀 코피를 내는 남자나, 냉혈한을 연기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러하죠. 결국에는 모두 밝혀지게 될 만들어진 환영일 뿐입니다. 그들의 유사성은 사랑이 아닌 자기와 상대방에 대한 기만으로 가득하죠. 반대로 진정한 사랑을 만난 주인공은 스스로를 꾸미지 않습니다. (근시라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며, 상대방을 사랑하죠. 그들은 이미 서로를 끌어당기는 유사성으로 묶여있습니다. 그렇기에 숲에서의 금기를 어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도 어찌 보면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타자의 고유성이라기보다는 나와 닮은 어떤 유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치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서 그곳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트의 사랑 같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환영을 본 것이지요. 눈이 멀어버린 여주인공을 보며 상심하고, 애정을 잃어가는 주인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들의 사랑은 단지 나르시시즘적 환영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추측할 뿐입니다). 영화는 말미에 우리가 궁금해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눈이 멀어버린 여주인공과 숲에서 도망친 주인공은 자신도 그녀와 똑같이 장님이 되기 위해, 화장실에서 칼로 자신의 눈을 도려내려고 시도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근시라는 자신의 고유성을 그녀에게 덧씌우기보다는 장님인 현재의 그녀를 사랑하기를 시도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타인에게 자신을 기입하기보다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리고 타인에게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비추어진 자신과 우리를 사랑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랑 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의 마지막 행동은 결국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같아야만 사랑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슬픈 단면을 더 부각해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둘 중에 어떤 것이 맞을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그 결과를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화가 마지막에 비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그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