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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Jan 26. 2017

#02. 경주

망각된 삶과 기억된 죽음의 교차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 살기 힘들어요.” 영화가 끝나갈 무렵, 윤희(신민아)가 던진 이 대사는 경주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상징과 은유를 명확히 드러낸다. 윤희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수없이 교차/반복되는 이미지와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장률 감독이 영화 <경주>를 이끌어 가는 핵심 주제인 '삶과 죽음'에 맞닿을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언제나 눈앞에 보이는 무덤이 공존하는 장소로서의 경주가 상징하는 바이다. 이때 영화가 무대화하는 주제는 단순하게 삶과 죽음의 대립적 관계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삶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으로서의 삶이다.

  

  영화는 최현(박해일)의 친한 형인 창희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그는 창희를 기억하며, 그와 함께 방문했던 경주의 찻집에 그려진 춘화를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한 최현은,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한다. 그는 어쩐지 죽음이 가까운 남자이다. 잠시 마주친 어린 소녀와 모녀의 자살, 과부인 윤희, 사고당하는 폭주족 등등. 죽은 자들의 무덤, 그 무덤과 ‘함께’ 존재하는 경주에서 최현은 살아있지만, 동시에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영화는 단순히 삶과 죽음을 직접 연결하고 형상화하지 않으며, 매개를 통해서, 즉 ‘기억’과 ‘망각’을 통해서 무대화한다. 영화 속에서 기억의 문제는 죽음만큼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찻집 한 벽면에 그려진 춘화로, 여정(윤진서)이라는 여인으로, 강물이 흐르는 돌다리로, 점집의 할아버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춘화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는 윤희라는 여인으로.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삶을 보증한다.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는 살아있었고, 살아있고,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동시에 죽음과 맞닿아있다. 모든 기억이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사그라지듯이, 모든 기억이 망각되듯이, 기억은 그렇게 있고, 삶 역시 그렇게 있다. 다시 말해 기억은 사라지면서(죽어가면서) 보존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억 속에서, 살아가며 죽어있고, 죽어가며 살아간다. 지금 이 모순적인 말이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기억은 삶을 보증해주지만, 그 기억은 처음의 그것 자체일 수 없다. 기억은 변형되고, 지연되고, 사라지면서, 차이를 벌리면서, 우리를 (비)존재하게 한다.


  <경주>라는 영화가 던지는 물음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닐 것이다. 그저 그렇게, 인간은 둘 모두를 품으면서, 삶과 망각, 기억과 죽음을 동반하며 살아간다. 죽음과 가까운 여인인 윤희는 그렇기에 능에 묻혀서 죽길 원한다. 능은 기억하고 있다는,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여인인 여정이 최현에게 말하듯이, 모든 것은 지워져야(죽음) 하고, 동시에/반대로 기억되길(삶) 원한다. 그렇기에 윤희는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왕릉에 묻혀 기억되길 원한다. 그럼에도 그 기억 역시 결국엔 빛바랠 것이다.


기억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지 못한다면, 삶은 허망한 것인가? 어찌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져 삶을 비관할 필요도 없다. 최현의 사그라지고 왜곡된 기억들이 최초의 것들과는 다를지라도, 그것은 역으로 다른 기억이 된다. 언제나 같을 수는 없지만 다시 한 번 삶을 기약해줄 수 있고 다른 삶으로 이끌어주는 그런 기억들로 말이다. 강물이 흐르는 돌다리의 진실을 알게 되듯이, 벽에 그려진 춘화의 기억 속에서 전에 없던 윤희가 새롭게 등장하듯이, 망각은 동시에 새로운 기억을 예비한다. 그 기억을 단순히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기억이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만 있다면, 오히려 이는 현실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망각을 벗어난 삶이 있을 수 없다면, 즉 삶이 이런 작은 죽음과 함께 한다면, 죽음(망각)과 삶(기억)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경계와 접촉하는 교차-얽힘 속에서 존재할 것이다. 다른 삶을 기약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춘화의 기억과 함께하게 된 윤희를 마주한 최현의 웃음은 그런 삶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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