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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Sep 30. 2016

#07. 낯선 첫 경험에 이름 붙이기

첫 경험은 그 무엇보다 강렬하다. 아, 야한 얘기가 아니라 일반론을 말하는 거다. 색다른 일을 시작해도, 반복하다 보면 결국 익숙해지고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사그라진다. 그러나 첫 경험이 주는 인상은 모든 경험 중에 가장 낯설고 오래 남는다. ‘처음’은 두 가지 상반되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설렘과 낯섦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오늘은 후자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낯섦은 왜 두려운가, 낯설다는 건 모르는 것이고, 알지 못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불안을 안겨주니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우화가 하나 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라캉의 정신분석학 수업에서 들었던 얘기다. 현대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나지만, 라캉을 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첫 경험이었던 거지. 물론 수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단지 라캉과의 첫 만남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던 생각의 단초들을 끌어내주었던 훌륭한 스승이 더 큰 이유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 라캉을 들먹이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전공자는 전무하다. 내가 알기로는 라캉으로 박사를 받은 전공자는 한국에 몇명 없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바로 그중 한 분이었고, 에헴. 자기가 박사도 아니면서 멍청한 자부심을 부리는 꼴불견이 여기 있다.      


선생님이 들려준 우화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물론 라캉의 방식으로(라캉의 방식에 대한 단편적인 소견은 글 하단에 첨부했다). 주제는 인간은 어떻게 사물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가, 이다.       

우화는 대강 이렇다.


아직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던 최초의 원시인들에게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한없이 연약했기 때문이다. 맹수들과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고, 초식동물처럼 빠르고 날렵한 다리를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현상은 더욱 두려운 대상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원시인들은 어두운 동굴에 웅크리고 앉아 그것들이 그치기만을 바라며 벌벌 떨었다. 그들이 자연현상을 두려워한 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모르는 것에 대한 낯섦, 그리고 그것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 원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기에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 원시인이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꽃에는 ‘번개’라는 이름을, 하늘에 떠있는 둥근 불덩이에는 ‘태양’이란 이름을, 온몸에 부딪치는 강렬한 비바람에는 '태풍'이란 이름을,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맹수에게는 ‘늑대’라는 이름을, 등등. 원시인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각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에 대한 낯섦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건 뭐야?, 라는 질문에, 저건 번개이야, 라고 답하면, 원시인들은 그것을 안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건 알 수 없는 것들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언어는 여기서부터 기원한다. 무언가를 설명함으로써 낯섦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원시인들에게 첫 경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름 붙이기였다.


나아가 그 경험을 설명함으로써 낯섦을 익숙하게 만들었고. 물론 우화이니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단지 하나의 통찰을 줄 수 있는 이야기일 뿐.       

누구나 살다 보면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원시인들에 비해 다행인 건,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미리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경험하지 않았는데 경험한 것 같은 착각...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서울의 맛집은 다 다닌 것 같다. 해외여행도 마찬가지.      


수영의 첫 경험도 다르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서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익숙하지 않은 탈의실에서부터 첫 번째 난관은 시작됐다. 수영복을 갈아입고 샤워를 해야 할지, 아니면 샤워를 하면서 수영복을 입어야 할지.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샤워를 하면서 입더군. 물기 가득한 몸에 무언가를 착용할 때의 그 낯선 느낌이란. 옷을 입고 젖은 것과 젖은 상태에서 입는 건 천지차이다. 물론 지금은 무심한 듯 젖은 몸으로 수영복에 발을 밀어 넣지만. 두 번째 난관은 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됐다. 급하게 수영복 세트를 사느라 본인이 안경을 쓴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도수 없는 물안경 덕분에 수영장의 모든 것은 뿌연 안개로 덮였다. 첫날에는 누가 강사님 인지도 몰라서 혼자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눈살을 찌푸리며 강사님을 찾아다닌 기억이... 세 번째 난관, 초급반 자리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한 나는 수영장에 들어갔다가, 화장실로 갔다가, 다시 샤워실로 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던 중 수영장 안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수업이 시작했단 신호라는 걸 직감한 나는 수영장에 들어갔고, 모든 사람들이 라인 안에서 일렬로 줄 맞춰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동공 지진. 난 어디서 해야 하지??, 라는 고민으로 당황했던 기억.      


이렇게 수영장은 나에게 낯선 공간이었고, 첫 경험은 불안과 두려움을 자아냈다. 일주일이 지날 때쯤에 그런 낯섦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왜냐하면 수영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상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영복은 샤워하면서 갈아입는 거고, 눈이 안 보여도 수영에는 지장이 없고, 저기 형광색 재킷을 걸친 분이 초급반 강사님이고, 초보의 라인은 첫 번째이지만, 준비운동은 두 번째 라인에서 하고, 강습을 마무리하는 준비운동의 마지막은 앞사람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이고, 등등. 모든 낯선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정확히는 문장을 붙이고), 설명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라고 말한다. 무언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 그래서 낯섦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 익숙해지는 것.     




취준생으로 살면서 경험하는 낯섦도 있다. 일단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삶 자체가 미개척지이다. 취업한다고 크게 바뀌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관찰 결과 취업을 하면 다들 아저씨가 되더라. 배가 나오고, 주름이 생기고, 얼굴은 푸석해지고. 듣기만 했지 몸으로 경험한 적은 없기에 취업 후의 삶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크다. 

사실 백수의 경험도 처음이다. 백수 비슷한 생활은 대학을 다닐 때도 자주 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엄마의 눈초리가 이렇게 따갑지는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는 자신의 모습에 어딘지 자조가 들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술값을 내지 않으려고 머리 굴리는 내 모습이 처량하기도 하고. 아, 이건 백수가 되기 전에도 그랬구나...     


두려움을 야기하는 첫 경험에 이름을 붙이기. 내가 <고래와 백수와 수영장>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다. 나에게는 최근에 두 가지 첫 경험이 있었다. 31년 만에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고, 동시에 공부하며 살겠다던 다짐을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도서관이 가장 큰 세계였던 나에게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던 세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들에게는 일상적인 그 경험이 나에게는 커다란 낯섦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될까 봐. 새로운 첫 경험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될까 봐. 그래서 이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글로 쓰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잘 알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이 첫 경험에 고래와 백수와 수영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비록 고래는 애초의 계획과 달리 첫 회 이후에 등장하지 않아서 걱정이긴 하지만. 다음에는 고래도 출연시켜야겠다. 그래야 이 경험에 대한 다른 설명을 붙일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나와 같이 구직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본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미지의 경험에 이름을 붙여보기를.



덧!!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란?

미국의 주류 정신의학이 생리학에 기반한 데 반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언어학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식 정신의학은 환자의 뇌에 이상이 생겼다고 여겨 약을 처방해주지만, 라캉식 정신분석학에서는 상담을 통해 환자의 말을 분석한다. 물론 약도 쓰지만. 의학적으로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뇌에서 분비하는 물질이 일반적인 경우와 조금 다르기에 약물을 써서 그 수치를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라캉은 이렇게 생각한다. 뇌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건 맞는데, 왜 오작동을 일으켰는지 알아야 진짜 정신 치료 아냐?, 라고. 다시 말해 환자의 뇌가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든 환경적 원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이 부러졌는데, 그 이유가 맞아선지, 넘어져서 인지, 아니면 자해를 한 건지 등등. 말하자면 정신병의 원인을 조사하는 탐정인 거다.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이다. 언어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구성하거나 억압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정신구조를 가진 인간이지 알 수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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