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갔던 여행기를 1년 뒤에 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여기.
LA 공항에서 플라이어웨이를 타고 유니온 스테이션에 가는 그 순간 나는 장담했다. 그리고 유니온 스테이션의 대합실 야외 공간에서 햇살과 바람을 느끼다가 확신을 했다. LA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취업을 하겠다고 돌아온 피터는 바보다. 어떻게 이곳을 두고 다시 올수 있었을까? 이 날씨와, 이 공간과, 이 분위기와, 그 안에서 자기 스스로의 모습과 그 모든 것을.
의료 비용도 비싸고, 보험비용도 개인부담이 높고, 물가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미국이지만 사람을 그저 긍정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날씨. 나라면 만약 지금처럼 한국에서 한 10년에 걸쳐 어느정도 이뤄놓은게 없이, 거기서 유학부터 시작했다면 아득바득 다시 웨이트리스부터 시작한 한이 있더라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애를 썼을 거다.
미국 열차를 늘 한번쯤 타보고 싶었기에 샌디애고-LA 유니온은 애초에 그렇게 먼거리도 아니어서 코스터를 타고 역에서 샌디애고 까지 갔다. 끝나지 않을것 같은 그 반짝이는 수평선을 열차 창 너머로 바라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르 마레 역에서도 한번쯤 묵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샌디애고에도 거의 한국인이 없었고, 내 삶의 터전에서 가졌던 그 모든 질서를 걷어낸 상태였지만 이곳에 와서 한 2주정도 산책과 수영과 해변 조깅만 하면서 살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순간을 음미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지만 날아가다가 날개가 꺾여버리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으로 충동적으로 샌디애고행 유나이티드 항공 이코노미 티켓을 질렀었다. 실로 그저 날개가 꺾인듯 기세가 꺾여버린 2023년 10월이었다. 승진도 커리어도 생각하고 있는 목표가 내가 생각한 기한의 범주 내에서 달성되고 있지 않는데 시장 상황은 너무 힘들고 조직적으로도 받쳐줄 시스템이 없어서 그냥 계속 몸빵을 하고 있는 경향이 지속되는 그런 상황. 그와중에 부모님의 이혼 절차는 드디어 마무리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의 폐허를 추스르는 과정에서 감정의 부산물은 나에게 알음알음 불에 탄 재처럼 날아오는듯 했다. 과연 내가 여기서 더 버틸수 있을까.
원래는 휴가에 와서도 계속 업무 관련 이메일이나 슬랙은 조금씩 트래킹은 하는 스타일인데 이번엔 마치 큰 파도를 타다가 서핑보드 위에서 무너져 물싸대기를 너무 크게 맞고 맛탱이가 간 상황이다보니 업무 트래킹이고 자시고 여행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나.... 1주일 넘게 장기휴가를 한창 바쁠 기간에 내버려서 혹시라도 무슨일이 생길까 너무나 불안했고 + 언제 어디서든 일하는 IT인은 결국 미국시간 오후 6시 (한국시간 9시) 이후로 결국 조금씩은 화상미팅도 들어가고 메일 답장도 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어차피 샌디애고는 저녁 7-8시를 넘어가면 딱히 갈데가 없고, 미국 동부에서는 4-5시면 한국의 9시가 시작되었을테니 이정도면 쉬는거지. 에어비앤비 숙소 근처 신선한 과일채소와 유기농 재료로 만든 가공식품들을 파는 Ocean Beach People's Food co-op (아마도 협동조합식 그로서리인것 같은데 조합원 가입료를 낸 사람에게는 포인트 및 할인혜택이 있는 카드가 나옴.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카드를 이용했다.) 에서 장을 봐다가 저녁을 해먹으며 노마드 코스프레로 일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다행히 카카오 보이스톡이 잘되고 유선랜과 와이파이 모두 지원해주는 에어비앤비 호스트 덕에 일하는게 지장은 없었다. 좋은 세상.
.
왜 미국 서부만 오면 이곳 사람들처럼 단번에 새벽5시에는 일어나서 거뜬히 6시에 조깅을 하게 되는걸까? 한국에서는 9시 출근을 위해 7시 반에일어나는것도 힘든데. 미국 서부 특유의 따듯한 날씨와 햇빛과 샌디애고의 아름다움과 친절한 사람들로 하여금 에너지가 자동으로 조금조금씩 채워지는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특히 기후는 가히 충격적일정도로 좋았는데 (사실 근 몇주간 비오고 안좋았는데 날씨가 딱 좋아지는 시점에 내가 왔고 1주일 후 내가 떠날때 즈음엔 다시 날씨가 안좋아졌다고 함) 내가 가지고 있던 "좋은 날씨"의 정의는 가을 샌디애고 여행 전후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던 좋은 날씨는 좋은날씨가 아니었어....
도망치듯 급하게 온 여행이라 (출발하는날 새벽에 수트케이스 채우고 공항에서도 직장에 메일보내며 옴) 여기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제서야 연락을 보냈다. 팟캐스트를 통해 만나게 된 조박님과 사라님에게 함께 점심을 먹을수 있는지 여쭤보고, 샌디애고의 토스트 마스터즈 공식 계정으로 원타임 게스트 요청을 했다.
.
샌디애고에서 평생을 나고자랐고 이곳의 빌리지 커뮤니티를 사랑하며 여행과 요가, 서핑을 좋아한다는 에어비앤비 호스트 타라는 미국 서부의 밝은 햇살과 긍정, 친절한 분위기를 사람으로 빛어놓은것 같다. 오느라 힘들었지? 이전에 일본에 가본적이 있어... 그렇게 스몰톡을 하고, 나에게 집안의 집기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고, 발코니의 자전거를 써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한다.
에어비앤비로 빌린 샌디애고 오션비치 가까운 전형적인 미국 주택의 방에 급하게 싸온 뭐가들어있는지 모를 27인지 수트케이스를 드디어 내려놓는다. 한국에서는 볼수 없는 큼직한 침대 높은 매트리스에 털썩 앉는 그 순간부터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이제... 어떡하지?
버려두고 오듯이 떠난 한국에서의 상황도 총체적 노답이고 내 중심도 많이 뭉그러진지 오랜데, 얄밉게도 시간은 계속 가고 놀리듯이 창문으로 샌디애고의 밝고 바삭한 햇살이 들어와서 침대에 그림자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