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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평한 미아 Sep 13. 2019

감정을 소화할 시간

감정 체증으로 아파본 적 있나요


지난 여름(7~8월), 나는 분노의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친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출퇴근길에서도 수시로 내 머릿속은 분노가 화르륵 불 붙곤 했다.


나에게 감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던 한 모임이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솔직하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특정인에게 감정을 쏟아냈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앞세워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상대방은 상처받았지만 그래도 내 행동은 옳은 일"이라고 만족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과의 관계는 삐걱거렸고, 주변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이 너무나 괴로웠다. 내가 원하는 생각대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자 (돌아보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고 외로웠다.

자기만의 방에서 내 감정과 직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그 모임에 잠깐의 쉼을 고했다. 그리고 수영도 잠시 쉬고, 사람들과의 약속도 나중으로 미루고, 회사에 한 주간 휴가를 내며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책을 읽고, 보고 싶던 영화를 보고, 내 감정과 지나온 일들에 생각하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일기도 쓰면서 내 감정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 시간을 거치고 나니 머릿속이 맑아지듯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상대방을 만나 정식으로 사과하고 화해했다.)




JTBC 예능 프로그램 <캠핑클럽>의 한 장면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갑자기 옥주현이 눈물을 흘릴 때 다른 멤버들은 옥주현에게 달려가서 위로해주는 대신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을 선택했다.


JTBC <캠핑클럽>의 한 장면
JTBC <캠핑클럽>의 한 장면



"원래 자기 감정은 자기가 처리할 시간을 주는 게 더 좋아"


누군가에겐 매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들이 굉장히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고, 슬픔, 눈물을 치우고 기쁨, 웃음, 행복을 억지로 밀어넣거나 밝은 분위기로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는 모습.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자신이 대면하고,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고, 조용히 기다려주는 위로.




내 슬픔이는 어디에?


나는 내 감정을 처리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는가, 스스로 소화하고 있는가. 그렇게 건강한 감정 생태계를 꾸려가고 있는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기쁨이 없으면 라일리(감정의 주인공)는 행복할 수 없어"라며 머릿속 세상 모든 존재가 한 마음이 되어 기쁨을 감정 본부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슬픔이가 방해된다며 슬픔이를 버리면서까지도. 영화 내내 슬픔이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스틸컷
영화 <인사이드 아웃> 스틸컷


나는 '부정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행복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슬픔·분노·짜증 같은 감정은 감추기에 급급했다. 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슬픔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슬픔을 애써 없는 것처럼 감추고, 안쪽에 가둬놓는다고 행복이 아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무시하거나 나쁜 것 취급할 때 우리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단조로운가.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기쁨이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주어졌고, 이 것은 다양한 감정으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쁨이라는 감정을 통해 힘찬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면 슬픔을 공감하는 시간을 통해 위로를 얻기도 한다.



다양한 감정이 조화로울 때, 즉, 여러 감정을 인정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면 삶의 기억들이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으로 채색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처리한 후에라야 감정을 올바르고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고, 건강한 관계, 공동체를 이뤄가게 되리라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시쳇말이 되어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이 되어야 할까.


현재/미래에 대해 고민을 깊이 해보기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도록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되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그리고 꾸준히 나는 이 시간을 '감정을 스스로 소화할 시간'으로 채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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