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사세요? 제주요.

참 어색하네...

by 레이지보이

벌써 일년이라니. 작년 12월 30일에 내려왔으니 제주도민이 된지 이제 일년이 흘렀겠다. 내가 태어난 후부터 시간은 단 한번도 느리게 간 적이 없었는데 25년 역대급으로 빠르게 느껴진다. 올초 3월 초등학교에 입학한 예민하디 예민한 아들 탓에 레이더를 바짝 세우고 지내다보니 5월이 넘어갓다. 6월부터 시작된 뜨거운 제주를 힘껏 양껏 온몸으로 받아내고 난 후 차오르는 기미를 식힐 선선한 바람을 느낄새도 없이 바로 지금 12월이 되어 버렸다. 사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12월의 제주는 서울의 가을만큼이나 포근하다. 날씨라는게 말이지 이때쯤이면 춥고 이때쯤이면 더워야 하는데 제주날씨의 흐름에 아직 적응이 안됐나보다. 아! 추위를 많이 타는 이들에게는 제주는 그야말로 축복이다. 물먹는 하마가 아니라 코끼리를 데려와도 부족한 한여름의 습도를 이겨낸다면 말이다.


이쯤되면 글쓴이가 제주도에 왜 사는지 나도 궁금할 것 같은데, 안물안궁일지라도 누군가 물어볼 수 있으니 이를 대비해 살짝 적어보겠다.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인생이 뭐 계획한대로 되던가? 나 역시 40대 초반에 제주도 넘어가서 살게 될 거라곤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족이 함께 제주도 산다고 하면 다들 물어본다. 생활은 어떻게 해요? 고맙게도 내 생활에 걱정을 많이 해주신다. 암 그렇지, 먹고 사는 문제는 성스러운 거다. 그런 이유로 한달에 한번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다. 불편하겠다고? 참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늘을 나는 것 뿐이지 KTX와 별만 다를게 없다고 대답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알다시피 비행기는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고 한번 탈때마다 제주 구석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약 1시간을 전기버스 멀미에 시달려야 한다. 물론 올때도 마찬가지이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편이라 버스를 기다리느라 공항에서 대기하는 경우도 왕왕있다. 그래 불편한거 맞다.


물론 좋은 변화도 있다.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저녁 약속이 빠지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왕창 늘어났다.게다가 이른 저녁시간부터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는 가족 뿐이다. 간혹 지루한 시간 덕에 아이와 나는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웃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때그때 공유한다. 아내와 나는 아이를 학교

보내고 근처 체육센터나 해안가를 찾아 운동을 한다. 운동을 마친 후 아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서로 필요한 업무를 처리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는다. 자, 이 구조에서 살면 가족끼리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건 뭐 양날의 검이니 개인의 성향에 따라 아닌 경우도 물론 있을터다. 여튼 나의 경우는 가족과 개인의 관점에서 제주의 1년은 꽤 좋았다고 정리하겠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제주에 살고 있는 이유는 지속가능한 먹고사니즘과 아이의 교육, 아내의 제주로망 그리고 타고난 나의 역마살이라고 해두겠다. 얼마나 머물거냐고? 글쎄 난 이곳에 몇년을 있겠다 라는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 각각은 제주타임라인에서 저마다의 계획이 있어보인다. 8세 아이는 입도 반년이 지난 후부터 본인이 제주도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느닷없이 제주에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의역한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7년을 거주한 아이의 확신이 이정도라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걸 가르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내 L역시 만족도가 높아보인다. 평생을 도박처럼 멀리해온 운동에 재미를 붙이며 여러 오름과 해안가 러닝에 심취해으니 말이다. (나는 평상시 아내라는 말을 쓰지 않으므로 흔히들 쓰는 이니셜로 L로 대신하겠다) 나 역시 지금껏 가만있다가 불혹을 넘기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고민하며 나름의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다.


제주 내려 왔다고 하면 뭐 대단히 큰 결심과 어떤 계기로 인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처럼 속세를 떠난듯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해는 간다. 우리 가족은 안타깝게도 쇼핑몰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도 주말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달려간다. 제주에 가면 왜 속세를 떠났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제주도라는 배경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 그 중요한 요소가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일거다. 여튼 꽤나 불편하지만 서울을 오가며 속세를 그리워하고 어디사냐는 질문에 '제주요'라는 대답이 아직은 어색한 우리 가족은 제주에 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