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지내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필요성을 못느꼈다는거지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다. 특히 여름시즌 제주의 바다를 즐기면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낯선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라는 것은 존재하니까. 예컨대 아침에 씻지도 못하고 먹어야만 하는 조식이라든가 타지의 낯선 공기 냄새라든가 그런 것들. 하지만 이번 시즈오카 여행은 대단히 중요하고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후지산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매일 보는 한라산 두고 왜 일본까지 가야만 하는 귀찮은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예전도 일본을 꽤 자주 여행했었다. 당시에는 온통 식당으로 북마크 된 내 구글맵이었는데 이번 여행의 북마크는 후지산 하나였다. 또 하나는 도쿄의 황궁. 계기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어느날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후지산 여행기를 보게 되었고 그냥 실제로 한번 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그뿐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후지산을 보고 싶고 단 하나만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한번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가서는 무엇을 사야하고 무엇을 먹어야하고 어디가서 사진을 찍어야하고 하는 것보다 단순하게 원하고 단순하게 여행해보는 것.
그래서 나는 후지산을 보러왔다. 차를 렌트하고 시즈오카역에서 한시간 반 정도 지났나, 눈에 덮혀있는 후지산이 눈 앞에 나타났다. 10여년 전 시애틀에서 캐나다를 넘어가는 길, 쾌쾌한 냄새 가득한 그레이하운즈 버스에서 몇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 창밖에 비친 로키산맥을 봤을 때 그 느낌. 꿈인가? 하고 마주했던 광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 너가 후지산이구나. 후지산은 여행 내내 존재감을 보였다. 후지산을 제대로 보는 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하는 거라는데? 옆에서 가스라이팅 하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삼대가 덕을 쌓은 셈치고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자주 눈에 담았다. 뒷자석 아이가 묻는다. 아빠 그래도 한라산이 더 높지? 아 이런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되겠군. 아니 후지산이 2배 정도 높을거야. 아이는 씩씩거리며 왜 한라산이 더 높지 않은거냐며 현실을 부정한다. 그렇게 한라산보다 2배정도 높게 솓아있는 삐죽한 후지산의 정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부드러운 곡선으로 제주의 절반을 감싸고 있는 한라산이 생각난다. 따뜻한 엄마처럼 느껴진다. 그래, 제주를 품은 설문대할망 신화가 괜히 있는게 아니었구나.
후지산 자체에 특별한 감흥이나 의미부여 보다는 그저 후지산을 보고 싶다는 말에 함께 날아와준 가족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한없이 가벼워진 여행의 목적이 앞으로의 여행의 양식 자체를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뿐 여행 내내 아내와 끊임없이 부딪혔다. 완벽한 P와 완성형 J가 함께 여행했을때 생길 수 있는 갈등 10가지라는 릴스가 있다면 아마 모두 해당됐을 것이다.
후지산의 감흥을 뒤로하고 가와구치 호수 근처 숙소로 향했다. 밤이 되자 길눈은 어두워지는데 차하나 들어서기 힘든 좁은 도로를 지나 언덕에 자리잡은 숙소 앞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와이프에게 물었다. 여기 맞아? 응 맞아. 진짜 맞아? 응 맞다니까. 생각보다 허름한 외관의 모습에 둘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멈칫거렸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거겠지. 입구에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신다. 아내에게 이것저것 설명하시는 중 아이와 내가 캐리어를 들고 들어섰다. 아주머니 표정이 일변하신다. 휴대폰 번역기에 대고 몇마디를 하시는데 표정은 말하고 있다. 어플이 정확하게 번역한 한국어, 우리 숙소에 아이는 올 수 없습니다. 나는 그날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간곡모드를 보았다. 파파고를 켜고 이 시간에 우린 갈 곳이 없어요 제발요. 아들은 내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긴다. 아빠 나는 그럼 여기서 못자는거야? 아냐 걱정하지마 해놓고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어? 분명 난 돈을 내고 쉬러 왔는데 장르가 이상해졌다.
주인분의 입장도 이해되는 것이 이곳을 이전부터 노키즈로 운영 중이고 예약사이트에도 설명이 되어있는데 사내아이가 불쑥 들어오니 놀라셨을 것이다. 여튼 주인 아줌마와 우리는 아이가 이 곳에서 묶었던 사실을 누설하지 아니 할 것과 성인 1명의 추가비용을 지불하는 다소 비밀유지조건스러운 내용으로 합의하고 짐을 풀기로 했다. 식사제공도 없는 료칸에 성인1명의 비용 추가는 덤이다. 주변 다른 숙소를 알아볼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대욕장 하나만 보고 가도 괜찮다는 한 유튜버의 영상으로 오게 된거 아닌가.
몇가지 이용수칙과 온도조절 등의 방법을 설명해주신 후 와! 드디어 대욕장을 보러가자 하신다. 깜깜한 복도로 안내하신다. 조금 걸어가다보니 복도 끝즈음 작은 쪽문이 하나 나왔다. 대욕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치고는 꽤나 수수한 모양새가 이내 마음에 걸린다. 문을 열고 우리를 안내해주셨다. 갑자기 차디찬 겨울 바람이 몰아친다. 바깥 통로가 나왔다. 아이가 말한다. 바깥이네? 그리고 바로 옆건물로 이어지는 쪽문이 보인다. 두번째 쪽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가 있었던 어둡고 오래된 료칸에서 극적으로 반전되는 따뜻한 조명과 고급마감재가 눈에 들어온다. 아들의 감탄사. 우와 좋은 냄새~
아니 잠깐만, 우리는 설국열차의 윗칸으로 이동한걸까? 주인 아줌마는 몇가지 주의사항을 추가로 말씀하신다. 이 건물 투숙객과 수건색이 다르고 섞이면 안되니 수건을 쓰고 다시 방으로 챙겨오세요. 그리고 이곳 숙박객들이 이용하는 이 라인을 넘어가시면 안돼요. 대욕장만 쓰는 거예요. (손으로 가리키며)여기 CCTV가 다 보고 있으니 꼭 지켜주세요. 우리는 이 곳에 오기전 대욕장을 옆 숙소와 함께 쓰는 공용공간으로 이해했지만 정확히는 얻어쓰는 형태였다. 이제 설국열차에 이어 영화 기생충도 떠오른다. 내 현실에서 약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2개의 영화가 모두 봉준호 감독의 영화라니. 거장은 거장인셈.
방으로 돌아와 와이프와 나는 이 상황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래, 그게 웃음이라 다행이다. 유튜버의 추천도 있었지만 도쿄일정까지 10일 가량의 체류기간 중 모든 숙소에 힘을 줄 순 없어서 골랐던 것 숙소다. 아이는 짐을 풀자마다 대욕장에 가자며 옷을 훌렁 벗는다. 아까 지났던 쪽문 2개를 다시 지나 남탕에 들어섰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사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온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다른 숙소로 가지 않은 걸 후회하던 중이었다. 한층을 더 올라가면 노천탕이 있다길래 올라갔다. 그래 뭐 좋긴하네, 밤이라 보이는 건 없었지만 겨울의 노천탕은 말해 무얼하나. 쌓인 피로를 풀며 아이와 함께 포켓몬의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이가 즐워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방에 돌아와 우리는 근초 마트에서 산 간식거리를 먹으며 이곳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일본 큰엄마집. 신기하게도 그렇게 부르고 나니 모든게 다 괜찮아졌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아이와 함께 대욕장을 다시 찾았다. 간단히 몸을 씻고 노천탕이 있는 윗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새벽의 청명하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후지산의 절경이 펼쳐졌다. 졸졸졸 흐르는 온천수 물소리 뿐인 조용한 새벽호수의 풍경 뒷편에 후지산이 그림처럼 서있었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잊을만큼 여행 3일차,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먼트였다. 물론 아이는 포켓몬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전에 대욕장을 함께 다녀온 이후로 아내와 나는 숙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 큰엄마 집에서 하루를 더 묵은 후 도쿄이동을 위해 다시 시즈오카역으로 향했다.
이렇게 마무리 된 시즈오카현 여행은 삼대의 덕을 느끼며 '후지산을 보겠다-후지산을 보았다'로 완성했다. 한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보면 되는 그리 대단일도 아닌 것을 굳이 이렇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고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를 해소하는 행동이 주는 효능감에 대한 기록을 위해서이다. 이번 여행은 아주 오랜만에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발현하고 그것을 온전하게 해소시켜보는 과정이었다. 이렇게나 아주 단순한 것을 말이다. 어떤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무언가,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그것을 위해 본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집착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가볍고 심플하게 목표를 설정 했을때 그 과정은 다양한 잡음은 줄어들고 오히려 명료해진다. 나는 여행가서 무엇을 했다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여행을 갔다로 치환 했을때 그 가벼운 설정값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 나의 목표는 두가지였다. 후지산을 보는 것과 황궁을 뛰어보는 것. 내 목표의 절반을 달성했다. 이제 도쿄로 떠날 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