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던 파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볼드저널 Nov 13. 2020

1년 중 10개월을 유랑하며 지냅니다

Nomad Modern Father

갑작스러운 팬데믹에 직장을 잃자 온 가족이 로드트립에 나섰다. 80일간 7개 도시에서 열두 가족과 함께 한 모던 파더 최영환이 들려주는 길 위의 여정.



https://youtu.be/s-3l2bqFNGw



우유갑에 편지를 썼다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던 시절, 매일 아침 나오던 우유갑에 편지를 썼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나, 멘토로 삼고 싶은 어른에게 나를 만나 달라는 내용이었다. 미래가 막연하기만 했던 20대에 이들을 만나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100장 넘게 꾹꾹 눌러쓴 우유갑 편지에 23명의 어른이 답을 보냈다. 전역 후, 군에서 모은 월급을 탈탈 털어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그분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때부터였다. 1년 중 10개월을 세계 곳곳에 돌아다니는 노마드 라이프의 서막.


현재 나는 뉴욕에서 문화예술교육으로 저개발국가의 자립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만나게 된 아티스트와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오면서 시작된 일이다. 덕분에 매년 여름 두 달은 케냐 해안가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에 거주한다. 마을에 물을 끌어오기도 하고, 흙바닥이 전부인 학교에 책걸상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림과 패션디자인 등 문화 예술을 가르친다. 이러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1년에 절반은 대학과 교육기관, 그리고 종교기관 컨퍼런스에 다니며 강연 활동을 한다. 이렇게 나는 2, 30대 청년층에 영감과 동기 부여하는 일이 참 좋다. 




갑자기 집을 떠나야만 했다. 


한창이던 나의 노마드 라이프에 '결혼'이라는 사건이 생겼다. 무슨 법칙이 있는 양 아내와 아무리 끈끈하더라도 3주 이상 떨어져 지내면 이내 관계가 서먹해졌다. 그리고 다시 가까워지기까지 출장을 다녀온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섯 살 아들은 괜찮은 줄 알았다. 출장을 오갈 때마다 쿨하게 나를 보내고 맞이하던 아이를 보며 역시 양육은 양보다 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내가 부재할 때마다 나타나는 아들의 의기소침한 행동이 보인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반년 이상을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소명은 너무 중요했다. 우리 가족은 한 팀이고, 팀에서의 내 역할은 노마드 라이프를 영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팬데믹이 터졌다. 모든 국내외 출장이 취소되고 강연 활동 또한 멈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또한 직장을 잃었다. 가장 큰 문제는 월세였다. 뉴욕 물가가 워낙 높기에 수입 없이 월세를 메꾸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중 때 마침 손주를 돌보기 위해 노부부가 잠시 머물 곳을 찾고 있었고, 그 기간만큼 ‘서블렛’을 통해 집을 내주기로 했다. (a.k.a. 서블렛_집을 단기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는 것) 자발적 홈리스가 된 우리는 재워주는 곳만 있으면 어디든 가기로 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필요한 짐을 차에 싣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로드트립에 나섰다.



















열두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가장 먼저 뉴욕 지인 집에 방문했다. 교회에서 만난 젊은 커플 티보와 헤일리가 흔쾌히 자기네 집 아파트 거실을 내주었고 3일을 머물렀다. 연이어 아들 긍정이 단짝 친구 알렉스 집으로 향했다. 학교 학부모로 알게 된 사이였지만, 그들 역시 우리를 위해 거실의 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모두가 함께 자고  일어나야하는 집 구조 덕분에, 우린 아침마다 서로의 부은 얼굴과 무방비 잠옷을 마주했다. 


동네 이웃과 대학 동문, 아프리카 봉사를 함께 다녀온 가정이 우리 가족을 환대했다. 낮에는 아이들이 밖에서 곤충을 잡고 밤에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었다. 점점 잊혀가는 꿈에 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웃고 삐치기를 반복하며 함께 머무는 법을 배워갔다. 


로드트립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어느 곳에서든 시원스레 볼일을 보는 나와 달리 아내는 남의 집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며칠간 볼일을 못 보기도 했다. 빨래할 여건이 마땅치 않아 빨랫감을 들고 돌아다니다 다음 숙소에 세탁기가 있으면 우리는 기뻐했다. 어떤 집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담소가 격렬한 토론으로 바뀌기도 했다. 얹혀 머무는 입장에서 한밤에 거한 토론을 치른 후, 다음 날 아침에 나누는 인사는 어찌나 머쓱하던지.


한 공간에서 두 가정이 더불어 먹고, 자며 참 많은 걸 느꼈다. 사적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법과 나이와 함께 단단해진 방어기제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 기록하기 힘들 정도로 진심 어린 환대를 받았다. 보스턴에서, 뉴햄셔프에서, 펜실베니아에서 딱 마침 우리를 위한 공간이 있다고, 얼른 오라고, 연락이 왔다. 




떠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80여 일간, 7개의 도시에서 열두 가족을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니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아내가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고, 흥 많은 아들과 팬티 바람으로 함께 춤출 수 있는 곳은 역시 ‘우리 집’이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온 사실에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일하던 직장에서 다시 복귀하라는 전화를 받았고, 나에게도 조금씩 온라인 강의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여름 밤의 꿈같던 로드트립이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러면서 바라는 것이 하나 생겼다. 이 어려운 시기에 손 내밀어줬던 그 친절을 우리 가족 모두가 오랫동안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받았던 수많은 환대가 훗날 이웃과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힘이 되길 바란다.





모던파더 최영환


선한 가치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멤버십 커뮤니티, ‘아웃오브보트'의 대표이자 다섯 살 긍정이의 아빠. 매년 여름 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와 함께 개발도상국에 방문해 그림과 패션디자인 등의 문화예술을 가르친다. 우유곽에 편지를 써 28명의 세계적인 명사를 만난 이야기는 <우유곽 대학을 빌려 드립니다>에 담겨있다. 








볼드저널 인스타그램

볼드저널 웹 기사 보러 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무심함과 스타일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