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가 집사인 나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일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낯가림이 심한지 매일같이 밥 주고 화장실 치우는 게 자기 눈에도 보일 텐데 나를 보면 멀찌감치 떨어지거나 숨어 버렸다. 양이도 나를 피했지만 솔직히 고양이가 싫고 무서웠던 터에 나도 피해 다닌 이유도 있다. 얼굴 안 보고 말도 안 섞는 서먹한 동거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나의 곁을 슬그머니 지나가고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양이를 발견하였다. 이후로도 죽고 못사는 사이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보면 도망가지 않고 피하지 않는 관계는 되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지금은 서로 눈인사를 하고 서로의 기분에 따라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지내는 사이 정도이다.
하루 온 종일을 같이 하는 집사와 허물없이 지내기까지 일년 이상이 걸렸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우리 집을 방문하는 친척과 친구들이 양이의 실체를 보기 시작한 건 한참 뒤였다. 그것도 장 속이나 침대 뒤, 소파 밑에 숨어 있는 양이를 조심스러운 집사의 안내로 잠깐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특별히 검은 색 옷을 입은 남자, 목소리가 큰 사람, 발소리가 큰 사람의 방문에는 하루 종일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랬던 양이도 세월이 흘러, 비교적 자주 오는 친척과 친구들 앞에는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거나 멀찌감치 앉아 있는다. 물론 검은 색 옷을 입고 목소리와 발소리가 큰 남자 앞에는 나타난 적이 없다.
양이의 대인관계 스타일을 분석해보면 호감과 비호감 사이에 중간지대가 넓은 편이다. 호감에는 찐 가족 네 명이 포함되고, 비호감에는 앞서 언급한 검은 색과 큰 소리내는 사람들이 포함된다(주로 정수기, 에어컨 등을 수리하러 오는 사람들, 동물병원 의사와 간호사). 중간 지대는 친정 어머니, 형제들, 친구들 그룹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냄새를 맡거나 어슬렁대는 축이 있는 가하면, 멀리서 한번 보고 들어가버리는 축이 있다. 방문횟수가 많고 목소리가 나지막하며 동선이 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계심을 풀고 호기심을 갖는 것 같고, 시끄럽거나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피해버린다.
인간관계처럼 미묘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만나면 즐겁고 재미있는 사람들, 존재만으로도 괜히 힘이 되는 사람들, 공감과 위로를 팍팍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사는데 큰 힘이 된다. 반대로 만나면 그다지 즐겁지 않고 괜히 만났다 싶은 사람이 있는 가하면, 집으로 돌아오면서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만남이 많으면 삶의 힘이 빠지는데 사람들로 인해 받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좋은 사람만 만나면 되는데 싫은 만남도 해야 하는 현실속에 살아간다. 단체로 만나니 빠질 수가 없고, 오랜 인연을 갑자기 끊기도 뭐하고, 공적인 이유로 만나야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러한 만남에서 싫지 않은 척, 적절한 예의와 형식을 갖추면서 티를 내지 않는다. 문제는 싫은 사람, 안 가고 싶은 만남도 피하거나 안 나가면 그만이지 할 수 있지 않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상담에서는 싫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꼴보기 싫은 사람, 얌체 같은 사람, 집착형 인간, 이기적인 사람, 지저분한 사람 등, 싫은 사람들은 다양하고 주변에 있기 마련이다. 구구절절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꼴불견인지, 이기적인지, 무례한지, 싸움을 거는지에 관한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주변에 한두 사람 있을 수 있는 사람으로 치부하기엔 존재감이 크고 자신의 웰비잉과 상관이 있기에 스트레스가 크다는 것이 요점이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 나도 싫은 인간때문에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대판 붙은 적도 있었다. 누가 이겼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양쪽 다 루저로 끝났고, 떨어질 수 없는 일관계로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다양한 사람이 군집하는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싫은 사람이 없기는 어렵다. 개인마다 싫은 이유에는, 내가 예민하고 고집이 세서, 상대방이 4차원이라서, 일하는 시스템이 열악해서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동된다. 자신이나 상대방 만을 탓할 수는 없는 미묘한 상황들도 있다.
양이가 싫어하는 사람의 조건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검은 색, 큰 덩치, 콘 목소리 이 세가지이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면 대처하는 방법도 쉬워진다. 양이처럼 피하면 된다. 싫은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쉬거나 잠을 자는 양이를 보면, 얼른 싫은 사람을 쫓아내야 겠다는 마음이 사라진다. 스트레스로 인해 벌벌 떨거나 잔뜩 긴장한 상태가 아니라 퍼져서 잠을 자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개인적인 관계라면 만나지 않으면 된다. 그대가 싫어서 안 만난다는 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만남을 줄이다 보면 소원한 관계가 된다. 상담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 거짓말하는 것 같다며 죄책감과 양심, 의리 문제를 거론하지만, 싫은 사람을 안 만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착하고 소심한 사람일수록,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라는 착각을 갖기 쉽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도,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도 없다는 존재이다. 싫은 사람이나 관계를 밀어내는 것이 잘못하는 일은 아니다.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싫은 사람을 대하는 법은 좀 다르다. 개인적인 관계에서야 피하면 그만이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지만, 공적인 관계에서는 완전히 피할 수 없기에 공존의 지혜가 필요하다.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가능한 마주치는 일을 줄이고, 마주쳐도 개인적인 대화나 시간 갖는 것을 피한다. 개인적으로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싫은 사람도 참아지기 때문이다. 싫은 사람의 이유가 큰 목소리나 사적인 공간 침해라면 이어폰으로 차단하고, 냄새나 지저분함이라면 방향제를 사용하고, 사적인 문자를 보낸다면 간단한 이모티콘으로 최소한의 반응을 하는 등, 유치한 방법들을 동원해도 된다. 문제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이다. 불운이지만 공존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싫음’에 매이기 시작하면 고단해지는 것은 나의 삶이다.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고 정리가 된다.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이유는 호와 불호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이왕이면 편하고 즐거운 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싫은 사람, 불편한 관계를 차단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에 너무 매이지는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양이처럼 피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계의 관계는 복잡하고 힘들지만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싫음에 매이지 말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즐겁게 사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