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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Jan 06. 2024

바라는 바

사진 출처

https://pikabu.ru/story/chto_poprosili_byi_u_deda_moroza_rossiyane_a_vyi_5595956


1.


한 해가 다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니,

덕담과 인사를 할 일이 많아진다.


그럴 때마다


종결 어미를

바래(요)”를 쓸지,

바라(요)”를 쓸지 고민한다.


내가 가진 두 가지 성향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2.


내 첫 성향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다.


각종 법규도 잘 지키고,

제출기한, 납입기한도 잘 지키고,

사적 약속 시간도 잘 지키고,

그냥 약속도 잘 지킨다.


말을 주고받음도 일종의 규약에 기반하므로

말의 사회적, 화용적 규범도 잘 지키려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Grice의 질의 격률(Maxim of Quality),

진심으로 말하라

Searle의 진정성 조건(Sincerity condition)이

기본 중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잘 모르면서 아는 척 말하는 걸 경계하며,


마음에 없는 빈 말도 거의 잘 안 한다.


그나마 일말의 진실을 발견하면 그걸 말하거나,

그마저 마땅히 없으면

아예 그냥 말하지 않음을 선택한다.


나의 “언제 한 번 보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선언이다.

보통은 그 자리에서 약속 시간을 잡으면서,

“언제”라는 시간 변수에

바로 적절한 값이 채워진다.

아님 며칠 또는 몇 달 후에 문득 연락해서

만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모국어든 외국어든

문“법”에도 맞게 말하려 애쓴다.


특히 외국어를 말할 때는

나의 외국어에 묻어나는

한국어식 엑센트란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기품 있는 말하기 수단이

정확한 어휘 구사와 문법에 맞게 말하기뿐이라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


3.


하지만 또 다른 나의 성향은

그래도 규칙보다 사람이 우선한다는 생각이다.


규칙은 사람이 만든 거고,

사람을 위해 만든 거라,

규칙과 사람이 충돌하면

규칙을 바꾸거나 

규칙에 예외를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걸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게 좋지만

약속을 못 지킬 사정이 생긴다는 걸 이해한다.


누군가가 약속시간에 늦는 것에도 관대하다.

시간보다 만나는 사람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자주 빈 말, 거짓말하는 사람은

경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빈 말이 중요한 의례이자

가장 쉽게 전하는 일종의 선물이라는 걸 이해한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제안하지 않은,

그들의 “언제 한 번”이라는 변수는

굳이 구체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낸다.


문법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틀린 게 아니라,

그 문법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어야 한다는 신호다.


사람들의 말이 먼저 있었고,

그 규칙을 정리해서 나중에 문법이 생겼다.


태초에 있던 것은

말(씀)이지, 문법이 아니다.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법이 생겼으니,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법이 아닌 것이다.


4.


다시 “바래(요)“, ”바라(요)“로 돌아와서,


“바라다”에 “-아(요)“가 붙으면,

“바라(요)”가 되는 게 문법에 맞다.


한국어 용언 어간 마지막 음절에

ㅗ,ㅏ가 있으면 어미 -아(요)를 붙이고,

나머지는 -어(요)를 붙이는 게 기본규칙이다.


그래서

읽다—->읽어(요)

예쁘다 —> 예뻐(요)

가다 —> 가(요)

좋다—> 좋아(요)

보다 —> 보아(요)

등과 같이 되는 거다.


이 규칙에 따르면

‘바라다’는 어간 마지막 음절 모음이 ㅏ가 있으니

어미 -아(요)가 붙어야 한다.


그래서 “바래(요)”는 틀린 표현이고,

“바라(요)”라고 말하고 써야 한다는 게

규범적(prescriptive) 접근 방법이다.


바래(요)

“(빛이, 색이) 바래다”의 종결어미가

“-어요”일 때 형태랑 같아서,

동음이의어를 만들기도 하니까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동음이의어 논리는 좀 많이 부실하다.


우선 동음이의어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악이 아닌

너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언어 현상이고,


“바라다”의 명사가 “바람”일 때

이 또한

wind를 뜻하는 “바람”과 동음이의어가 되는데,

그 동음이의어 회피 논리라면

“바라다”의 명사는 “바램”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규칙에 맞는

“바라(요)” 대신

규칙에서 벗어난

“바래(요)“라고 쓰게 된 걸까?


아무래도 “하다” 때문인 것 같다.


위의 규칙에 따르면

”하다“에 종결어미 ”아(요)“가 붙어

“하요”가 되어야 하는데,

우린 예외적으로 “해요”라고 말한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예외 없는 규칙이 여기에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우 자주 쓰는

하다—>해(요)니까,

유추(analogy)에 따라

바라다—>바래(요) 라고 추론하고는,

아니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고는,

“-이길 바래(요)“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 명사까지 “바램”이라고 만들어 쓰게 된 것 같다.


이 “해요”라는 예외가 있다는 걸 깨달은 후

나는 생각했다.


“해요”가 예외로 인정되면

바래요”도 예외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문법이 먼저 있고,

우리가 그 규칙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말을 하고,

그 규칙을 정리해서 문법을 만든 것이고,


예외도 사실 처음부터 예외였던 것이 아니라,


그 정리된 규칙으로 설명 못하는 걸

어쩔 수 없이 예외로 묶은 것뿐이지 않는가?


이렇게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대로

거기에 맞춰

언어 규칙을 기술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는데,

이건 기술적(descriptive) 접근법이다.


5.


규칙과 사람이 충돌할 때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나는 당연히,

언어연구의 규범적 접근법보다는

기술적 접근법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 대화에서는

구어체를 사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래(요)”를 계속 써왔다.


그런데 법이 먼저인 한국의 정서 때문인지,

규범적 접근법에 근거한 국어 교육 때문인지

최근 “바라(요)”가 많이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문법엔 맞지만

생기가 없는,

의식적으로 교정한 말 같아서

그래서 왠지 진심 없이 가식적으로 느껴지는

어색한 “바라(요)”

아무래도 안 내켜서

고민하다


결국

“바랍니다”

“바랄게(요)“

또는

“기원합니다”

“기원해(요)“라는

제3의 선택으로 문장을 끝맺는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바라는 게

워낙 특별한 날에 하는 특별한 일이긴 하지만,

그 동사가 가진 모순 덕분에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게

특별하면서 까다롭기까지 한 일이 되어 버렸다.


6.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슬라브어 동사에는

“바라다”와 관련된 이런 선택과 고민이 필요 없다.


동사 자체의 선택은 말할 것도 없고,


워낙 기원의 문구가 좀 틀에 박힌 데다가 

외국어라서 독창적 문구를 크게 찾지 않고

어디서 들어 본

그냥 흔한 기원 내용을 반복하는

쉬운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어 “바라다”

특이점이 하나 있긴 하다.


러시아어를 비롯한 슬라브어에는

상(aspect)이라는 문법범주가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행위가 완료되었는지, 완료되지 않았는지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읽다’라는 동사는 러시아어로

불완료상 читать(치타트)과

완료상 прочитать(프로치타트)로 표현할 수 있고


‘우리는 신문을 읽었다’를 말하고 싶을 때


불완료상을 써서 Мы читали газету.라고 말하면

“우리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라는 의미가 되고,


완료상으로 Мы прочитали газету.라고 말하면

“우리는 신문을 다 읽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슬라브어에서는

이런 두 가지 동사가 모두 동명사가 되어

“읽고 있음”의 동명사와

“다 읽음”의 동명사,

이렇게 동명사도 2개씩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어는

이제 그런 동명사가 없는데,

‘바라다’라는 의미의 동사에는

예외적으로

두 가지 동명사 형태가 명사로 남아있다.


7.


러시아어 불완료상 명사

желание(젤라니예)

나 자신이 바라는 바,

욕망, 소망, 소원이다.


완료상 명사

пожелание(포젤라니예)

타인을 위해 바라는 바,

기원이다.


불완료상, 완료상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나 자신의 욕망, 소망, 소원이라는 불완료 과정이

타인을 위한 기원으로 완료되는 것이다.


보통 자신의 소원, 소망은

꼭 분절음으로 말할 필요가 없지만,

타인을 위한 기원은

그들이 듣고 읽을 수 있게 말해야 하니,


러시아어에서

Я желаю(나는 —을 바란다)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타인을 위한 바람을 담는다.


마치 “바라다”의 본질이 혹은 궁극적 종착점

이타적이어야 하는 듯 말이다.


8.


러시아 말고

다른 슬라브어에서는

명사에 이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대체로 나를 위한 소원

타자를 위한 기원

같은 명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I wish가

나의 소망과 타자를 위한 기원 모두를

비슷한 비율로 표현하는 영어, 한국어와 달리,


그것이 무엇보다도

타자를 위해 바라는 행위를 표현하는 건

폴란드어, 불가리아어, 체코어,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몬테네그로어도

러시아어랑 똑같다.


그래서 보통 이들 언어의 “바라다” 동사 다음엔

타자를 지칭하는 “-에게”에 해당하는 표현과

기원하는 내용이 동사 뒤에 나온다.


예를 들어,


폴 Życzę ci wszystkiego najlepszego! (모든 좋은 것을 기원해)

체 Přeji ti úspěch.(성공을 기원해)

불 Желая ви весели праздници.(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세크보몬 Želim ti puno sreće. (행운을 빌어)


물론 자기 자신의 소망을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때는 “자기 자신에게”라는 의미의 표현

si, sobie 같은 걸 특별히 덧붙인다.


역시 예를 들어,


폴 Czego sobie pan życzy? (당신은 뭘 바랍니까?)

체 Přál si, aby ten hluk přestal. (그는 그 소음이 멈추길 기원했다.)

불 Желая си само здраве.(건강만을 소망해)

세크보몬 Želim si nov dom.(새 집을 소망한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se, 독일어 sich처럼)

슬라브어에서 si, se, sobie 등이 붙은 동사는

재귀동사(reflexive verb)라는

특별한 유형의 동사가 된다.


즉 언어적으로만 보면,

슬라브어에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바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바라는 게

좀 더 특별한 행위가 된다.


슬라브어에서는

바라다”가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한 행위로 취급되는 것이다.


9.


슬라브어의 기본 단어는 서로 매우 비슷하다.


영어의 want에 해당하는

욕망 일반을 표현하는 슬라브어 단어는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슬라브어에서 거의 같다.


러시아어 хотеть(호테트)

우크라이나어 хотiти(호티티)

벨라루스어 хацець(하체츠)

폴란드어 chcieć (흐치에치)

체코어 chcít (흐치트)

슬로바키아어 chcieť (흐치에츠)

슬로베니아어 hoteti(호테티)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몬테네그로어 hteti(흐테티)

불가리아어 искам(이스캄)

마케도니아어 сака(사카)


아마도 욕망 자체를 표현하는 동사가

개별 슬라브어로 분화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기본 단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건 당연해 보인다.


한편 타자를 위해 기원하는 동사

개별 슬라브어에서 좀 더 많이 달라진다.


러시아어 желать (젤라트)

우크라이나어 бажати (바자티)

벨라루스어 жадаць(자다츠)

폴란드어 życzyć(지치치)

체코어 přát (프르샤트)

슬로바키아어 priať(프리아츠)

슬로베니아어 želeti(젤레티)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몬테네그로어 želeti(젤레티)

불가리아어 желая (젤라야)

마케도니아어 посакува(포사쿠바)


개별 슬라브어로 분화하고 난 후에

타자를 위해 기원하는 의례와 그 의례적 표현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 또한 놀랍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건

기본적이고 일차적이지만,


타자의 욕망까지 신경 쓰는 건

학습과 교육과 문화적 발전을 통해

우리가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좀 더 고차원적인 사회활동이기 때문이다.


10.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연말연시는

스스로를 위한 소원도 빌고,

특히 타인을 위한 기원도 빌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다.


사람들은 무엇을 소망할까?


러시아어 불완료상 명사 желание(젤라니예)로 검색하니 이런 게 나온다.


“만약 성인 러시아인이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면, 무엇을 달라고 할까?”


라는 질문의 설문조사다.


https://pikabu.ru/story/chto_poprosili_byi_u_deda_moroza_rossiyane_a_vyi_5595956


답변은 왼쪽 위부터




많은 돈     건강       행복

17%         63%       27%


새 차   새 아파트   가족과 새해 맞기   여행

6%          8%                 8%                 8%


새 스마트폰  2%  아기 갖기  2%  진정한 사랑  2%  결혼  2%   새해 첫날 일하지 않기 2%




예상대로

건강이 압도적인 우위고,

그다음이 행복이다.


타인을 위한 기원도 별로 다르지 않다.


완료상 명사 пожелание(포젤라니예)를 검색하니

며칠 전 기사에서

러시아인은

새해에 타인에게 이런 걸 기원한다고 나온다.




40% 건강

14% 인내와 낙관주의

13% 행복과 기쁨

11% 모든 면에서 좋은 일, 성공과 운

10% 돈, 임금인상

6%  승리


출처: https://rtvi.com/news/russian-field-50-rossiyan-pozhelali-sootechestvennikam-v-2024-godu-okonchaniya-svo/




인내와 낙관주의, 승리는

현재 러시아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 같은데,

다른 것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어떤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기본적인 기원의 말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11.


나의 새해 소원도

이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의 새해 덕담도

건강과 행복부터 시작한다.


예전에 외국인 친구, 지인에게 들었던

덕담을 떠올리면

뭐 크게 다르지 않겠다고 예상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폴란드인은 새해에

자신을 위해 무엇을 소망하고

타인을 위해 무엇을 기원하나 검색해 봤는데,


환경평화, 국가의 번영과 안녕 

뭐 이런 거시적인 것들이 검색된다.


폴란드인 답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유(wolność)도

무엇보다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기 나라의 자유를 의미한다.


폴란드인들 때문에

갑자기 나의 사적인 소망과 기원이

너무 미성숙하고 이기적으로 보인다.


체코인은 또 어떻나 검색해 봤는데,

무엇을 소망하고 기원하는가 보다

어떻게 덕담하는가에 대한 설문 기사가 나온다.


이제 전화보다는

문자 메시지 등으로 새해 덕담을 한다는 게

기사의 골자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는 전화를 일일이 해서

새해 덕담을 했단 것일까?


그러고 보니, 체코인들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주로 가족들하고 집에서 보내서,

프라하의 연말연시에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었다.


이방인에게는 좀 쿨하고 차가운 것 같은데,

체코인들 가까운 사람과 인간관계는 끈끈한가 보다.


그런 체코인들 때문에,

내가 그동안 주고받았던

나름 진심 담은 새해 덕담 메시지가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올해는 연말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헌 해가 지나가는지,

새해가 시작되는지도 잘 못 느끼고,

시간에 등 떠밀려

얼렁뚱땅 한 해의 경계를 넘었다.


내가 소셜미디어를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지,

매해 점점 더 새해 덕담을 덜 주고받게 되는데,

올해는 특히 그게 더 심했다.


그런데다가

단체메시지나 단체메일로 받는 경우도 많아서,


거기에 담긴 불특정 독자를 향한 “바람”들이

읽자마자

“바람”에 실려 가볍게 날아가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뭔가 올해는 더 허전하게

한 해를 시작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게

“설날”이라는 기회가 또 남아 있다.


그때까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폴란드인처럼 거시적 소망과 기원도 생각해 보고,

체코인들처럼 더 진심을 담아서 성의 있게,

러시아인의 표현처럼

나의 소망을 차곡차곡 쌓아

타인을 위한 기원들로 승화하여 완성하도록,

우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건 또 무엇인지,

바라는 바에 대해서

좀 진중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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