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1
서울로 상경하여 첫 근무를 하던 직장의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작년 이맘때에도 떠나보고는 싶었지만, 그 스물여덟 즈음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것을 쏟아붓지도, 그렇지만 쏟아붓지 않았다 해도 엄청나게 슬프지 않던, 마냥 무던하게 흘러갔던 시간이었다. (스물여덟 해까지의 내 모든 시간이 무던했다던 것이 아닌, 스물여덟 즈음이 그랬다) 그날들의 나의 일상은 눈을 뜨고 일 센티의 틈도 없는 교통수단에 몸을 맡긴 채 파도를 타듯 몸을 왔다 갔다 반복하면 어느새 일터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다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고 어쩌다 끼니를 한 끼 거르면 그것이 내심 나를 슬프고 처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오늘은 내 몸의 체중 한 끼를 덜어냈다는 생각에 스스로 환호를 해주던 너그러운 인심을 갖고 있던 시간들.
그렇지만 스물아홉 해,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새콤달콤한 맛이 가득한 주스를 채운 유리컵 한잔이 있다면, 주스를 벌컥 다 들이마시고 바닥에 갓 깔린 마지막 남은 주스 한 모금 뒤에 찾아오는 쌉싸름한 여운, 그것을 그득하게 입안에 머물고 있던 때가 스물아홉이었다. 달콤함 뒤에 느껴지지 않던 쓴맛들이 나는 것이었다. 입안에 남은 쓴 여운을 무엇으로도 없애고 싶은데 그것을 늘 알고 지내던 것이 아닌,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의 미각으로 덮고 싶었던 것이 이번엔 기필코 여행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혼자이든 아니든, 서른 살이 되기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이십 대가 가기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그 새로운 미각을 발견해야만 나를 무럭무럭 자라나게 해 줄 주스의 원료가 될 양분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나이가 들면서 고민에 결정을 내릴 땐 현실적인 것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몇 안 되는 이유로 하고 싶은 것을 미루게 된다면 나의 서른 살은 이룰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여행 욕망과 현실적인 요소의 절충안을 찾아 나름대로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계약이 만료되었으니, 사표를 쓰고 무모하게 ‘퇴사’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다시 취업을 할 때까지의 생활비와 부가적이고 현실적인 요소들로 인해 모아둔 돈을 전부 써버려도 안 되는 일이었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20대 초반의 무모함과 즉흥적이고 맘 가는 대로 행동했던 나는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결국 그렇게 수많은 여행지 중, 많은 양의 금전과 시간, 게다가 체력까지 써야 하는 세계일주, 순례길 등이 우선적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일단은 하루 치의 시간 동안 좀 더 커다란 양의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여러 후보군이 떠올랐지만, 사색에 딱 맞는 곳은 역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제일이다 싶었다. 또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러시아라는 큰 나라를 ‘횡단’ 했다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나를 가장 혹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해 전부터 가고 싶다고 마음에 품었었지만 가이드북만 사놓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했던 여행지였다. 그리하여 기필코 이번에는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9박 10일, 손가락 열 개로 표현이 가능하니 조금은 짧은 시간, 그렇지만 일곱 요일을 지나고 삼일은 더 있으니 조금은 긴 시간. 이 시간 동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은 난, 때마침 시간과 금전적 양분의 질량, 그리고 타이밍까지 들어맞은 사촌 동생과 함께 모든 준비를 마치게 됐다.
그렇게 출국을 몇 주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때마침 내가 가장 많은 글을 읽고 그 글들을 품은 한 작가님의 북 토크에 참여하게 될 기회가 생겼고, 토크가 마무리되면 작가님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날 강연에서 작가님은 우연히 예전에 탔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관한 아주 일부를 이야기를 해주셨다. 난 내 차례가 되어서 그 일부를 놓치지 않고, 곧 제가 러시아 여행을 갈 것이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내 이야기에 사인하기 위해 숙이고 있던 작가님의 고개에는 흠칫 미세한 반동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예매를 마친 것이에요? 거긴 바가지로 머리를 감아야 하는 그런 곳이에요!”
왜 때문인지, 힘들 것을 의미하는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의 말씀에 난 엄청 웃어 젖혔는데, 이것은 여행을 앞두고 괜히 나의 여행을 알아주고 반겨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돼서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내 여행뿐만이 아닌, 그 이후의 시간에도 자극제처럼 조금은 더 평범하던 일상들에 조금은 더 커다란 사건이 되어줄 것을 난 알고 있었다.
작가님은 책에 적던 사인을 마무리하며, 일말의 뜸을 들이다 나에게 최후의 한마디를 꺼내 놓으셨다.
“어쩌면은,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것은 러시아로 떠나기 전, 마치 내 직장생활이 끝이 난 것보다도, 마치 새벽 다섯 시에 벽을 뚫고 넘어오는 옆집 신혼부부의 코골이에 어처구니없이 잠을 깬 것보다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든, 나에게 가장 강력하고 커다란 사건이었다.
2019년 겨울,
열흘 동안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가 계속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