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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혜 May 20. 2020

설국열차의 냉정과 열정사이 #1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3



#1 열정하나


러시아에 오기 전부터, 이 횡단 열차 안에서 꼭 하고 가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열차 안에서 판매하는 컵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 컵은 열차 안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빌려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원할 때는 구매도 가능하다고 했다. 컵은 마치 빈티지 스타일의 찻잔처럼 생겨, 손잡이가 달린 은색 거치대 안에 분리된 유리컵을 끼워 사용했다. 이런 생김새는 내 취향과 지극히 딱 들어맞았고, 나는 그 컵을 꼭 구매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것이었다. 다만, 열차마다 구매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질문하는 법을 연습하고, 컵을 팔고 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기념품을 구매할지 몇 가지의 대책들도 세웠다. 꽤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난 맘을 졸이며 까맣고 흰 삼선슬리퍼를 끌고 열차 차장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꼭 여행지에서 혼자 가게에 들어가 주문을 해야 하는 것처럼 괜스레 조심스러웠다. 이런 탓에, 내 발걸음을 옮겨주는 슬리퍼만이라도 친근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옆 차장 칸에 도착하니, 혼자 티타임을 갖기 위해 내가 사고 싶은 그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는 차장님이 있었다. 혹시 잠깐의 여유를 내가 방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도 없이 차장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긴 노란 머리와 파란 큰 눈을 갖고 있던 차장님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한번 천천히 깜빡였다. 그것은 무슨 일인지 얘길 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이런 눈인사를 받다니.


개인적으로 난 눈빛의 힘과 무게를 꽤 중요시하게 여기는 편이다. 눈빛의 힘을 가진 사람을 믿는다고나 할까. 눈빛은 가장 짧은 시간에 그 사람 안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그런 막대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섣부르지만, 그 찰나의 시간 안에 그 사람의 비밀을 엿들은 것만 같은, 그 사람은 나에게 비밀을 들킨 것만 같은, 착각인 것 같지만 결코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는 걸 알게 하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간혹 그 눈빛이 연기였던 적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그 사람이 비겁했던 것일까, 나의 약해진 마음이 그 거짓이 보이는 눈빛을 진실로 부추기는 걸 모른 체했던 것일까. 이런 무수한 질문들을 남김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많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난 아직도 눈빛의 힘을 믿기로 했고, 누군가의 눈인사를 받으면 주체할 수 없이 맘이 들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한 번의 눈인사를 건네받았던 이 순간에도.


타지에서 눈인사를 받은 순간, 참으로 감격스러운 마음과 따뜻함이 솟구쳤다. 그러한 원인에 난 또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울컥함으로 달궈진 낸 눈빛을 차장님께 건넸을 것이다. 글썽이듯 초롱초롱 빛나는 벅찬 눈빛과 함께 미리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컵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차장님은 바로 옆 칸에서 새 컵을 꺼내 주었다. 가격은 1120 루블, 한화로 약 2만 원 초반 정도의 금액에 나는 그 컵을 구매했다.


“쓰바시바!”

-“쓰바시바!”


나는 그 나라의 언어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새로 산 컵에 처음으로 레몬 향이 나는 티백 하나를 담갔다. 그 터지는 향을 담은 차 한잔에는 따뜻함이 팔팔 끓더니, 그 열정의 온수는 내 속에서 점점 더 날 데워버리곤 여행에서의 체온을 더욱 끌어올렸다.


꼭 독한 감기에 걸리기 직전, 딱 그만큼의 온기였다.



2019년 겨울,

열흘 동안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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