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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혜 May 22. 2020

잔향, 그리고 '오물'의 먹잇감이 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세이 #6

향기는 당신과 함께했던 온 순간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함께 저장시켜놓았다가, 다시 그 향기로 인해 당신과 함께였던 온 장면과 기억들을 상대방에게 떠올려준다.

온전히 나 혼자였으면 몰랐을 것을,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게 된다. 함께 어울려진 순간과 장면, 그리고 기억들이 남아 우리라는 존재를 만든다.


당신이 나에게 남겨준 기억의 잔향으로 인해, 나도 당신과 함께할 때의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해 보게 된다. 한 때는 당장 눈에 드러나는 큰 마음만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크지 않고 강력한 향기를 당장 내뿜지 않아도 좋으니, 조급해 하지 않을 테니,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오래 함께 했으면 한다. 그렇게 천천히, 오랫동안 당신을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러시아의 첫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정리를 할 때였다. 방 안에서 연신 꿉꿉하고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촌동생은 갑자기 ‘오물’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오물’이라 하면, 바이칼호수에서만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 하는데, 열차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무렵 옆자리에 있던 아저씨들과 그 훈제 생선을 사촌동생도 같이 나누어 먹었다고 했다. 난 그 시간에 단잠에 빠져있었다. 잠깐 눈을 떴을 때는 마치 소시지를 구운 것 같이 잔뜩 맛있는 냄새가 났는데 그것이 생선 냄새였던 것이다.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으나, 숙소 방 안에서 둘만 있으니 느껴지지 않던 더 비릿한 냄새까지 자세히 느껴졌다. 사촌동생은 열차에서도 씻고 또 씻었는데도 아직까지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며 심지어 본인의 옷에서도 나는 것 같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챙겨 왔던 향수를 꺼내 좁은 방안에 모든 곳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토록 우리가 오물의 먹잇감이 된 형국이었다. 사촌동생은 앞으로는 절대

‘오물’ 같은 건 먹지 않겠다 말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깔깔 웃어대기만 했는데 그 입장이 내가 되었으면 나 역시도 그 느긋함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라 장담한다.




평소 나는 향에 참으로 예민한 습관을 갖고 있었는데, 방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방안에는 갖가지의 향들을 고루 품은 디퓨저와 캔들 같은 것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식당에서 진득한 음식을 먹고 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베인 냄새들을 퇴치하기 위해 섬유향수 같은 것을 꼭 챙겨 다녔다. 그러다 가끔씩 맡아보지 못했던 맘에 꼭 드는 새로운 향수의 향기를 발견하게 될 때면,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내가 온통 뿜어내고 싶다는 생각들을 했던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내 후각을 끓게 했던 향기들도 있다. 카페에서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내린 에스프레소가 퍼질 때의 향이라던가. 오랜만에 본가에 갔을 때 익숙하게 풍겨오는 이불, 옷, 등의 갖가지의 직물 향이라던가. 빵집을 들어갔을 때 풍겨오는 달콤한 빵 냄새라던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땅이 축축이 젖어드는 냄새라던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풍겨오던 체취라던가.


한 번은 내가 두 해 동안을 그 근원지가 어떤 향수인 건지, 섬유유연제인 건지 알지 못하고 애타게 찾아 헤매던 향이 있었다. 꼭 빨래를 하고 나면 맡을 수 있는 포근한 비누향기 같았는데, 그건 정작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선 맡을 수 없고, 그냥 길을 걸어간다거나, 아니면 내가 앉아있는 버스에 앞 자석에 누군가가 탔을 때 풍겨온다거나, 꼭 내가 무방비한 상태였을 때 순간적으로 훅 파고들어왔다. 그래서 유명한 브랜드의 향수라던가 향기들을 시향 해보고 찾아다녔는데, 내가 맡았던 그것과는 달라 절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입욕제, 섬유향수로 유명한 매장에 들려 옷에 한번 뿌려봤던 것이, 처음에는 풍기지 않던 향에서 내 몸에서 내 체취와 섞여 점점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그 향으로 바뀌어 번져오고 있던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섬유 향수를 뿌려놓은 곳에서 내가 찾던 것과 똑같은 향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습게 그 향기도 전에 시향을 해본 적이 있던 섬유향수였는데, 그것을 뿌린 직후 맡아보았던 냄새는 단지 알코올 냄새와 다름이 없었기에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치부했던 것이다. 참으로 향기는 그것만으로 온전히 좋은 향기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만나 어우러지고 난 후 풍기는 잔향이 더 진국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향을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내가 좋은 향을 품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를 떠올렸을 때, 그때 함께 올려다보았던 하늘도 마치 거대한 단내를 뿜어낼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것처럼.


발렌타인데이에 지하철을 타면, 평소에 나지 않던 달콤한 향들이 지하철을 가득 메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향기를 내뿜고 싶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갖가지의 향수들을 뿌렸을 것이다.


향기는 당신과 함께했던 온 순간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함께 저장시켜놓았다가, 다시 그 향기로 인해 당신과 함께였던 온 장면과 기억들을 상대방에게 떠올려준다. 온전히 나 혼자였으면 몰랐을 것을,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게 된다. 함께 어울려진 순간과 장면, 그리고 기억들이 남아 우리라는 존재를 만든다.


당신이 나에게 남겨준 기억의 잔향으로 인해, 나도 당신과 함께할 때의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해 보게 된다. 한 때는 당장 눈에 드러나는 큰 마음만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크지 않고 강력한 향기를 당장 내뿜지 않아도 좋으니, 조급해 하지 않을 테니,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오래 함께 했으면 한다. 그렇게 천천히, 오랫동안 당신을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19년 겨울,

열흘 동안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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