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가을 단풍길 산책은 ‘선재길’ 만한 곳이 없지 싶다. 선재라는 이름은 어린 승려가 산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붙여졌다. 이곳은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월정사에서 현존하는 한국종韓國鐘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이 있는 상원사까지 약 8㎞ 남짓한 산속 오솔길이다. 야트막한 산새에 길이 험하지 않아 오래 걷고 많이 생각하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와 가족과 손을 잡고 걷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출발 며칠 전부터 아이에게 화를 자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짜증 내는 주기마다 감정을 실어 아들을 잡는 내가 점점 싫어질 때였다. 선재길의 맑은 길을 걸으며 오롯이 나의 화를 오솔길에 뿌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깊어가는 가을이면 외로워지는 마음 근육이 화려한 색감으로 바꿔지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고 싶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잇는 선재길은 버스가 왕복을 하고 있다. 차도와 숲 속의 인도가 마주 보고 있어 자신과 그리고 함께하는 여행자의 체력을 고려해 코스를 정하면 된다. 월정사에서 반야교, 동피골 주차장까지 걸어도 좋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상원사까지 내쳐 걸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왕복 3시간 정도의 여유만 갖는다면 말이다. 아예 처음부터 상원사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 느릿하게 걸어 내려오는 코스도 추천하고 싶다.
아들과 나는 오대산 월정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원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달빛이 아름다운 월정사에서는 10월의 문화축전이 거대하게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하는 널찍한 버스에 앉아 차창 안으로 들어오는 따듯한 가을 햇살에 몸을 맡겼다. 불그스레한 계곡선을 따라 올랐다. 시원스레 이어진 붉은 숲길에서 거친 행진을 하는 차에 의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그저 자연이 그림이 되는 공간을 낯설어하지 않는 듯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고 날며 엄마 앞에서 날렵한 몸을 자랑하기도 했다.
겹겹이 쌓여 날지 못하는 늦가을 낙엽이 선재길 위에 전부였다. 차가 다니기 편한 큰 도로를 벗어나 오롯이 계곡을 따라 오가는 선재길은 참선의 길다웠다. 계곡은 끊어짐이 없이 내 눈 앞에 놓여 있었고, 사람들의 소리도 묻혔다. 간혹 도로의 돌멩이를 박차고 올라오는 기계의 바퀴 소음도 우리 곁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아들과 내가 손을 잡고 걷기에 약간 비좁은 공간이기도 했다.
앞서 길을 걸어가던 아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쓰러진 고사목 枯死木에 눈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테를 세면 나이를 알 수 있잖아요. 음, 꽤 된 것 같네요.”
나이테를 세다 말고 같이 반응하지 않고 앞으로만 걷는 엄마를 향해 대충 얼버무리며 일어서는 아이. 이럴 땐, 나도 함께 앉아 자연을 탐색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고. 그 순간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집에서의 바쁜 일상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좀 늦게 가면 어때.’, ‘끝까지 다 걸을 필요가 있나. 힘들면 넓은 길로 나가 버스에 올라타면 되잖아!’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 남아 있는 걱정을 머릿속에서 재고 있었다니.
두 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에너지의 잔량이 없어져 가면서도 아이는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올해 초등 2학년이 된 아들의 최대 장점은 꾸준히 말을 잘하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장점이 이 산속에서 또렷이 발현되고 있는 듯했다. 반 친구들과 몸 씨름을 했던 이야기, 짝꿍에 대한 이야기, 무언가 자신보다 잘하는 반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학교 이야기뿐만 아니라 엄마가 논리성이 없이 감정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자연스레 꺼냈다. 여행에선 서로 쌓인 감정을 푸는 시간이기도 하다.
‘말만 안 끊고 들어줘도 많은 것을 하는 겁니다.’라고 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조선미 교수의 말이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오가는 차 안에선 내비게이션보다 더 내비게이션 같은 그런 아들의 말을 끊지 않으려 노력한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 중간중간 여러 갈래로 엉킨 나의 마음을 솔직히 열기도 하면서 말이다. 여행을 할 때마다 아들에게 잔소리가 줄어들었다는 것과 대화의 장場이 자연스럽게 열린다는 것을 느낀다. 나도 가끔, 아니 자주, 잔소리가 없는 엄마가 되고 싶다. 20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