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보슬 땅이 열리는 어느 따스한 봄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요양원 입소를 시작했다.
최근 아버지의 머리는 여러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곤 하나 집을 떠난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작년 연말부터 400킬로 남짓 되는 친정을 자주 오간 것은 결국 아버지의 요양원 입소 준비의 마중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육체의 방황보다 정신의 가출이 심각해 보였다. 영혼이 탈출해 있는 시간에는 젊었을 때의 폭력성이 자연스럽게 몸을 치장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늘 편안하게 신었던 고무신. 요양원에 데리고 간 몇 안되는 소지품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늘 친절하지 못한 사네였다. 소심함의 끝판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에서는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사네였지만 유독 집안에서는 왕좌의 권세를 누렸던 것.
내가 기억하는 젊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랬다. 손가락 사이를 거쳐 입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일터에서부터 몸에 절어있는 술 냄새는 아버지의 일상이었다. 아내에게 보내는 둔중한 욕설과 고함, 폭력은 자식들을 불안에 떨게 하곤 했다. 그러했기에 아내인 엄마는 그런 사네를 신뢰하지 않았고 곁을 능숙하게 주지 않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유독 아내와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만큼은 있는 꼰대 없는 꼰대를 다 부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곤 하나 농사일이나 바닷가 뱃일을 내팽개치며 빈둥거리며 생활을 영위했단 말은 아니다. 유독 큰 손과 발로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았을 때 아내에게 손찌검과 욕설이 바람을 탔던 것.
요양원 들어가기 하루 전, 세상 편안하게 자신의 유일한 방안 세상에서 딸의 웃음에 반응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5년 여 전부터 뇌의 지배를 건강하고 능숙하게 받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치매라는 것이 최근의 기억부터 사라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닌 오래전 머슴살이와 일제강점기 직후 이야기, 군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분명 기억은 여러 시절을 현재와 함께 여행 중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일이나 바닷가에 뱃일 외는 집 밖을 나가는 것을 싫어했던 남자였다. 나이가 들어가며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밤새 잠을 설치며 몽상에 빠져드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걷기와 일어나기가 불편한 몸에도 재가 등급을 받고 집에서 목욕을 받는 정도였다. 아버지의 젊음을 검게 칠했던 그 찬란한 어둠의 터널을 밖으로 꺼내오고 있었을까. 빠져나오지 못한 시간에는 헤매고 헤매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만만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깊어가는 아버지의 치매 근황이 들려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달려갔던 곳. 고향 친정집 근처 바닷가의 해넘이.
엄마는 아버지가 놓아버린 정신세계의 가출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또 정신없는 소리 한다.”라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아버지로 대하고 있었다. 치매 상태의 일탈로 생각하지 않는 엄마의 결기로 아버지의 화를 돋웠는지 모른다. 옆에서 아버지에게 대꾸를 하다 큰 손으로 머리를 맞고 슬퍼서 울고 있는 엄마를 두고, 평생 화투장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 아내에게 화투판에서 노름을 한다고 윽박지르는 아버지를 두고, 남편을 피해 잠을 청하는 사이 새벽에 이웃을 돌아다니는 아버지를 두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힘들게 한다는 엄마의 근황이 들려오면 엄마 곁에 있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속마음을 표현하며 곁을 내줬던 아버지였다. 조금이나마 그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고향 지역, 거금대교휴게소 근처에서 만난 분홍 동백꽃.
몇 번의 친정 방문은 아버지의 요양원 입소 절차를 나를 중심으로 밟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이 들고 있을 때쯤 엄마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언제 그랬냐?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며 고개를 젓곤 했다. 12월 방문 때는 인근 지역에 사는 큰언니 가족들과 재가 요양 서비스에서 시설 요양으로 바꾸는 절차를 진행했다. 1월에는 친정에서 가까웠던 종합병원 내 요양원을 접수했고 7명이나 대기로 기다려야 한다는 답을 받았다. 언제가 될지 정확한 날짜를 정해주지 않았기에 다른 한 곳도 더 접수해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접수를 했던 요양원에서 자리가 났다.
남도 거금도에서는 따스한 햇살과 마주하며 매화가 꽃잎을 올리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바빠 왔던 3월의 개인사 일정은 그 자리에서 모두 멈췄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잘 메워나가고 있었다. 남편도 아내를 처가와 장인어른에게 내어주고 일상을 잘 버터 내는 듯했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요양원에 입소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아버지를 지켜보며 병원에서 1박을 함께 했다. 아버지는 딸을 병원 관계자라고 생각해서인지 내내 묻는 말에는 ‘네, 네’를 하며, ‘선생님들 말 잘 듣고 있어라.’는 말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허공을 보다가도 ‘네’라고 뱉어내 주기도 했다. 마지막 하룻밤은 정신이 가출한 아버지에게 간혹 정신이 든 아버지에게 살갑게 붙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았고 몰라도 좋았지만, 아버지에게 요양원 입소 생활, 식사 예절, 운동 등에 대해 걱정된 부분을 솔직하게 말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게 아니었을 것이다.
요양원 입소 하루 전,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마지막 점심밥을 함께했다.
엄마에게는 투정 부리며 먹지 않던 점심밥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잘 먹고 입소를 한 것을 보면. 휠체어에서 고개 한 번 돌려 봐줬으면 좋았으련만. 그때는 또 가족들이 뒤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