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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Jan 18. 2020

37. 회사 생활의 면면들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아이들이 이질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듯, 저도 직장의 다양한 면면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시즌 별로 과제가 있을 경우에는 야근이 많았는데, 특히 전략 발표 준비에는 결론이 애매한 야근이 많았습니다.

 

전략 발표 전날, 모든 자료를 차, 부장님께 넘기고 8시쯤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윗분들이 다시 부르셨습니다.

“발표 자료는 다 준비가 되었어. 발표용 슬라이드는 15장인데, 각 장마다 임팩트 있는 문구를 넣었으면 해. 사자성어로.”


발표 자료에는 매출 등의 숫자 외에 사내 통용어, 그리고 유행하는 용어들이 가득했습니다. 비전, 핵심 가치, 수종 사업, 업의 특성, 마하 경영, 파괴적 혁신, 스토리 텔링 등등. 그 위에다 각각의 소제목으로 사자 성어를 마지막으로 넣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답이 없는 경우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 때까지 머리를 짜 내야 했습니다. 가벼운 위트도 좀 넣자는 말에,

“영업팀의 활동을 거북선과 같은 돌격선의 이미지에 빗대면서 ‘자충우돌’이라는 말로 어필하면 어떨까요?”

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모든 팀원이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만, 정답이 없는 회의의 분명한 결론은 10시가 넘어가는 야근이었습니다.


사실 보고서의 내용은 대부분 무거웠습니다. 실무진부터 시작해서 위로 합의에 합의를 거쳐 적힌 백억, 천억 단위의 숫자들…. GE의 젝 웰치의 전략, ‘1등 혹은 2등을 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와라’하는 식의 전략은 절대로 보고 될 수 없었습니다. 목표는 무조건 달성하는 것이었고 ‘마른 수건을 짜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동기는 1박 3일의 러시아 출장을 가기도 하고, 그리고 성과가 없다고 깨지고, 누구는 구매처가 못 받겠다는 자재를 일단 배송부터 시키고, 물건 받을 공간이 없으면 컨테이너라도 어디서 수배하고…, 그런 일들이 무용담이 되어 회식 자리에서 건배로 이어지고…, 회사 생활은 그랬습니다.


영업팀에 열정이 있었다면, 소재개발팀에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구매처의 완제품 개발팀과의 미팅 후 식사 자리에서 소재 개발 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품을 지구 상에서 누군가가 만들어야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가 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재 개발 팀장님은 구매처 팀장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않으셨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개발팀원 십여 명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업 담당자로 참석했던 저도 눈치껏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에 마주하던 구매처 팀장님도, 그 팀원 십여 명도 모두 무릎을 꿇고 마주 않았습니다. 삼겹살을 사이에 두고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각 팀장님들은 조폭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깨 인사를 받으면서 검은 승용차를 타고 자리를 뜨셨습니다.

얼마 후 전자결재로 통보된 신제품 개발 완료 품의서에는 대표 이사의 승인 멘트가 있었습니다.

‘세계 일등 제품을 기대합니다.’


저는 그 말과 모니터 너머 책상에 붙여 놓은 제 메모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3류 기업은 노동력을 팔고, 2류 기업은 기술을 팔고, 1류 기업은 특허를 판다.’

그리고

‘초일류 기업은 표준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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