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the film
시장을 주름잡던 기업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세상이 이렇게 트렌디하게 움직이면서 시장을 뒤흔들 만큼 진보적인 기술이 사용화로 이어질 때가 그러하다고 봅니다. 2000년대 세계적으로 각광받던 산업 중 하나인 필름산업도 마찬가지 이노베이션을 맞이하게 됩니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예견되었지만, 이를 제대로 대응하여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기업은 후지필름이 유일합니다.
2000년대 카메라 필름산업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니 위기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직면하게 되지요. 1876년에 설립된 아그파포토(아그파)는 세계 최초로 엑스레이 필름, 컬러필름, 자동 노출기 사진기 등을 출시하며 필름산업을 이끌었으나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라는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며 140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2005년 5월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코닥도 마찬가지였지요. 1881년 설립되어 13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코닥은 롤필름 생산,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했습니다. 당시의 코닥은 최첨단 기술을 선도하며 20세기 최고의 기업으로 꼽혔지요. 전성기였던 1976년에는 미국 필름 시장의 90%, 카메라 시장 85%를 장악할 정도로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1975년에 발명한 디지털카메라는 코닥의 발목을 잡았다.
후지필름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아날로그 필름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위기를 맞게 되지만 후지필름은 아그파나 코닥처럼 과거에 목메기보다 자신들이 그동안 축적해 온 기술력에서 숨겨진 자산(Hidden Asset)을 찾아내고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는 성장전략을 수립, 위기를 극복해 갔습니다.
결과론으로 보자면 흔히 비교대상이 되면서, "코닥은 디지털에 대응하지 못해 사라졌다."라고들 합니다.
사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닥은 2017년 현재의 구글이나 애플 정도의 앞서가는 기업이었습니다. 코닥 연구소는 공대 출신의 수재들이 가고 싶은 연구소로 꼽혔고 창업주인 이스트먼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필름 사업의 성공으로 얻은 부를 사회에 환원했고, 사원들의 복지를 향상하였으며, 연구소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연구소가 비슷한 콘셉트로 운영되다 최근에 축소한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정말 별 필요 없을 것 같은 병 x 같은 연구라도 신청하면 돈이 나왔고, 수재들만 모였으니 특허가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코닥의 특허는 그 잘난 애플도 눈독을 들일 정도였고, 결국 2012년 코닥은 5억 2천만 달러에 애플이 참여하고 있는 특허회사에 특허 포트폴리오를 매각합니다. 코닥의 기술력은 그 잘나서 자기네 제품 들고, 판타스틱!!! 을 외치는 애플도 탐을 냈다는 겁니다. 다시 돌아가서 보자면 80년대부터 디지털 연구에 거액을 투자했고 이미 1975년에 이미지를 디지털로 기록하는 장치를 개발했고, 같은 해 베이어 패턴이라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CCD, CMOS 배열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캐논과 니콘의 카메라 바디에 자신들의 센서를 결합한 테스트 제품도 내놓는 등 디지털카메라의 역사에서 코닥은 단연 앞서 있었습니다. 디지털 원천기술을 다량으로 확보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상품화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단하신 코닥이 망했지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코닥이 휘청이게 되는 사건은 "98 협의"입니다.
중국시장에서는 후지필름이 저가공세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도 후지가 저가 공세로 죽을 쑤고 있었고 코닥은 무역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트럼프 노믹스에서 보호무역으로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를 높였지요. 외와 비슷한 정부 차원에서의 제제를 요청한 겁니다.) 그래서 코닥이 여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CEO가 직접 중국으로 날아가서 중국 정부에게 딜을 합니다. 후지필름 몰아내고 코닥 필름을 독점으로 팔 수 있게 해주면 중국 전역의 현상소를 코닥이 떠안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98년 협의가 되어서 점유율은 올랐습니다만 시기가 98년이었다는 게 발목을 잡게 됩니다. 필름 시대의 끝물에 저런 무모한 딜을 하다니...
몰론 중국이라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당장 망하진 않았습니다. 부자 망해도 3년 간다고 하지요? 그런데 다른 삽질을 하게 됩니다. 일단 잘못된 전략을 수립하지요. 디지털카메라(이지쉐어라는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이것을 자신들이 보유한 전국의 현상소(Develop & Print, DP점)와 연결시키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협공인 셈이었죠. Easy Share는 2001년 발표되었는데, 카메라만을 의미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디지털카메라를 포함한 프린터, 프린터 독, 온라인 사진 인화까지 포함한 개념이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합니다. 코닥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인화와 관련된 인프라를 융합하여 새로운 셰어를 만들어 내는 개념이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그 사진기를 가지고 오면 현상소에서 알아서 다 인화해주고 프린트해주는" 원스톱 서비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친 게 있습니다. 아니 예상과는 달랐다고 해야겠지요.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으로 어려운 사진이라는 영역이 대중화되고 일반화되었습니다. 유저가 늘어났지만 실제 인화와 출력까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출력하기보다는 모니터로 보는 편을 더 선호했고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것으로 발전되게 되었죠. 결국 코닥은 전국의 DP체인을 정리하고 그 인력을 해고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지쉐어 브랜드는 지금도 남아있지만 프린트 관련 사업부는 모두 철수하고 온라인 인화 서비스만 '코닥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