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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Jan 26. 2023

설렘애호가

덕질



퇴근을 하기 위해선 약간의 연기가 필요하다. 침대에 누워 아이들을 재울 땐 내가 먼저 잠든 척한다. 연기의 시작이 너무 성급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조바심을 낼수록 육아퇴근은 늦어진다. 기대나 바람을 버린 채 마음을 비우고 사고를 멈춘다. 아이들의 수다가 끊기고 뒤척임이 줄어들면 때가 되었다. 연기라고 해서 별다른 건 없다. 편안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고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면 된다. 그리고 아이들의 잠이 영글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와 침실 밖으로 나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소음에도 아이들이 깨지 않을 만큼의 시간. 아이들이 낮잠을 잤다면 잠든 척 연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잠든 척하는 나에게 아이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꼭 대답이 하고 싶은 질문이라도 참아야 한다. 그러다 정말로 깊은 잠에 빠지면 낭패다. 아이들을 재우고 보내는 나만의 밤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을 참고 얻은 시간에 무얼 하는 가 묻는 다면 별건 없다. 가끔 과일 토핑을 추가한 요거트아이스크림을 시킨다. 그걸 먹으며 로맨스 드라마를 본다. 아이들이 일찍 잠들어 거실 TV를 통해 본방사수를 하게 되면 남편과 드라마를 함께 보는 경우도 있다. 웹소설 원작의 드라마를 보며 남편은 계속해서 이게 재밌냐고, 이게 보고 싶냐고 옆에서 딴지를 걸곤 한다. 같이 봐달라고 원한 적 없는데 옆에 앉아서 왜 이러는 걸까? 결혼 8년 차. 남편과 나 사이에도 한때 존재했던 것 같은 '멜로'는 이제 TV 속에만 있다. 기념일 한번 챙길 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남편과 살면서 유부녀가 된 이상 외간남자와의 썸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저게 말이 되든 안 되는 아내가 드라마라도 보면서 대리 셀렘 좀 느껴보겠다는데 왜 이렇게 방해를 하는 건지. 요즘은 인터넷으로 각종 영화나 드라마를 제공하는 OTT가 많아서 좋다.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만 버리면 핸드폰으로 내 시간에 맞춰 얼마든지 보고 싶은 로맨스를 볼 수 있다.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어떤 가수나 특정 배우에게 빠져있기보단 새로운 로맨스 드라마가 시작되거나 영화가 개봉할 때면 극 중 남자 캐릭터에게 덕질을 시작한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남자 배우의 이미지를 포털사이트에서 한없이 찾아본다. 그렇다고 모든 배우에게 빠지는 건 아니다. 나만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그 취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요즘 빠져있는 남자 배우는 나보다 15살이 어리다. 이 배우는 얼굴을 가리고 눈 또는 입술만 보여주며 누구인지 맞추라고 해도 한 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보통 미남이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외모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 외모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진성성이 담긴 표정으로 여자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대사를 칠 때면 내 몸속에서 새로운 피가 흐르는 것만 같다. 뜨거운 피로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몸은 피곤하고 드라마는 끝났지만 이제야 깨어나 정신을 차린 느낌이다. 내일의 할 일 따위는 잊고 지금 이 자유의 시간을 탕진하고 싶지만 내일의 육아를 위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는 오늘 보았던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해 본다. 그 배우가 했던 임팩트 있던 대사를 떠올리면 가끔 발바닥이 찌릿할 때도 있다. 그렇게 잠들기 전까지 드라마에 빠져있어서 인지 꿈속에서 드라마의 내용이 이어지기도 한다. 꿈에선 내가 여주인공이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다가 알람을 듣고 겨우 깼을 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전개가 조금 빨랐다면 좋았을 텐데. 중간 생략하고…


현실로 돌아와 어제와 별 다른 거 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은 이미 출근했고 나보다 먼저 깨서 배고프다고 성화인 아이들에게 간단한 아침을 챙긴다. 남편과 생활대화만을 이어간다. 아이가 곧 학교 입학이니 책가방을 사야 한다. 누나에게 물려받은 신생아 카시트를 사용하고 있는 둘째에게 이제 주니어 카시트를 사주자 등등.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먹을 수 있는 점심시간과 이후 커피 타임. 그리고 아이들 재우고 보는 로맨틱 코미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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