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루한(참배움연구소장)
‘교육’의 말뜻은 무엇일까? 그 말밑(어원)을 살펴보면 민본사상을 무게 있게 다룬 동아시아의 경우는 맹자에 ‘교육’이 나온다. 멍쯔(孟子)가 군자가 가지는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며 그 세 번째를 일러 ‘득천하영재이교육지삼락야得天下英材而敎育之三樂也’(진심장盡心章)라 하였는데, 천하의 훌륭한 인재를 얻어 이들을 ‘가르쳐 기르는 것’이란 뜻이 된다.
서유럽에서는 아이가 지닌 숨은 힘을 밖으로 이끌어 낸다는 에듀케이션education이란 말이 있다. 페다고지pedagogy란 말도 있다. 학교, 박물관, 체육관, 유적지 등 보이는 문화유산을 견학하면서 설명을 듣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익히도록 이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본의 ‘교육칙어’(1890)에서 내세운 ‘교육’이 ‘조선교육령’(1911)에서 널리 쓰이게 된 뒤로 ‘교육’은 대한민국에서도 어떤 사람들(교육자, 사회 공학자, 사람 길러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피교육자’라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일로 줄곧 써 왔다. 그들(‘교육자’들) 생각에 피교육자에게 좋은 일이어서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교육이란 강제로 부추기고 강요하는 억지배움이다.
예컨대 죽은 ‘한자 교육’이란 억지 배움을 들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말글살이를 할 때 토박이말을 앞세우고 널리 쓰기에 힘써야 하리라. 몸의 핏줄처럼 흐르는 냇물처럼 토박이말로 말뜻을 시원스레 소통할 수 있으니. 하지만 ‘교육부’는 오히려 ‘한자 교육’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2019년부터 초등교과서 한자 300자 표기”란 정책 추진처럼 ‘학생’은 물론 교사, 학부모, 시민 단체들에게 끊임없이 억지배움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교육과정’, ‘교과서’, ‘수능고사’의 형식 등으로.
돌이켜 보자. 우리의 학교생활은 어떠한가? 학교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었던가? 그동안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교는 ‘생각하는 배움’을 돕기보다 몹시 해쳐 온 것이 아니었던가? 획일적인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억지배움’을 아무런 성찰 없이 반복하는 일상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고, 결국 바보가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이고 여태까지 ‘교육’이 무익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학교의 불합리한 규율로 가르치려 해 온 ‘교육’이란 억지배움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부탁한 적도 없는데 다 널 위해서 가르쳐주는 거야 하는 것은 반대해야 한다. 사람들은 삶(생활) 속에서 배우는 게 교사한테 배우는 것보다 못하다고 굳게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사람들은 부모 노릇 전문가에게 ‘부모 교육’을 받아가며 선생이 직접 해 보이는 걸 봐야 아기에게 기저귀를 채울 수 있는 것일까? 모유 먹이기부터 복잡한 기술까지 모든 배움의 과정을 새로운 교육 슈퍼마켓에서 (돈을 받고) 파는 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문’ 교사들이 가진 지식을 ‘교육’에 쓴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주어야 할 때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벌어지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집에서, 일터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말이다. 코로 직접 냄새를 맡고,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는 격식 없이 부탁받고 가르치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살 권리가 있다.
‘교육’이란 이름의 ‘억지배움’이 되풀이되는 ‘양계장 학교’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처럼 군림해 온 국가와 학교 교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결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억지배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참배움의 선택과 결정의 자율권을 최대한 많이 누려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도와 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만, 배우는 사람 맘대로 골라 배우도록 돕는 일은 참다운 교사라면 마땅히 도전해야 할 특권이며 스스로 배움의 기쁨을 맛보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