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주방에는 상부장도 팬트리도 없었다.
특별히 요리도구나 그릇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자주 쓰는 식기와 냄비는 매번 허리를 구부려 꺼내야 하는 하부장보다는 밖에 나와 있는 편이 훨씬 편하다. 주방용 미니 TV가 달려 있던 코너 선반에는 차도구와 컵을 올려두니 공간이 꽉 차버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상부장을 달고 싶진 않았다.
반복 동작을 줄이고 싶다는 욕망과 주방벽을 비워두겠다는 의지의 첨예한 대립.
육체의 편안함을 위해 타협해서 너무 길지 않은 두 개의 선반을 달기로 했다. 하나는 주방 개수대 옆 매일의 아침과 저녁을 담을 그릇과 접시를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발코니에 달아 냄비 삼총사를 얹어둘 곳으로. 주방 내부에는 타일에 못을 박아야 해서 꽤나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타일에 금이 가진 않았지만 콘크리트를 뚫는 드릴의 진동 때문에 구멍 근처의 줄눈에 금이 갔다. 줄눈 보수제로 벌어진 부분을 메꾸니 적당한 거리에서는 거슬리지 않았다. 이 역시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가.
타일벽에 비하면 콘크리트벽에 구멍 뚫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선반 아래쪽의 수납장 위의 도구들을 싹 옮겨두고 큰 비닐로 덮었다.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구멍을 뚫어주고 선반을 올렸다. 선반 다는 데에 가장 까다로운 건 상판의 수평 맞추기와 다리의 수직을 맞추는 일이다. 왼쪽 선반 다리는 왼쪽으로 살짝 틀어지는 바람에 다리와 상판 사이에 1mm의 틈이 생겼다. 선반을 쓰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지금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설치할 때는 그 1mm의 미완이 아쉽다는 거.
작은 발코니 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냄비들. 아주 오래전 선물 받은 베르미어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작은 액자에 걸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