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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yton Sep 15. 2024

식탁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

집의 바닥재는 중요하다. 재질과 색 둘 다. 캔버스로 비유하자면 스케치를 할 종이의 색과 종류가 아마 바닥재와 같지 않을까. 규모가 크지 않은 주거용 실내 공간에서는 대개 바닥의 질감과 색이 공간의 톤&매너를 결정해 버린다. 만약 벽면을 특별한 스타일로 강조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집의 바닥재는 방과 거실, 주방까지 모두 같은 종류인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멀바우(Merbau) 원목으로 추정된다. 왜 추정이냐 하면, 내가 아는 멀바우는 색이 진하고 살짝 붉은 끼가 돌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진해진다고 알고 있어서인데 우리집의 경우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통창을 통해 빛에 가장 오래 노출되는 거실 마루는 해가 깊게 들어오는 딱 그 부분까지 노랗게 빛이 바랬다. 전체적으로는 너도밤나무 목재와 비슷한 색으로 보이고, 심지어 어떤 패널은 대나무인가 싶을 정도로 밝아 보이기도 한다. 가장 밝은 창가부터 어두운 복도까지 마룻바닥의 색이 점점 짙어지는 그레디언트 현상을 볼 수 있다. 거실과 달리 해가 들지 않는 현관 복도와 북향인 서재는 내가 아는 멀바우의 찐하고 붉은 끼 도는 바로 그 색 그대로다. 뚜렷한 경계 없이도 거실과 복도, 방의 바닥은 질감은 같지만 색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같은 목재라도 직사광선에 의해 색이 변형되는 방식이 다르다.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실 테이블은 북미산 참나무(White Oak)로 만들어졌고, 계속된 태닝으로 처음 구매한 당시보다 훨씬 짙어지고 붉은 끼가 돌게 되었다. 왜 멀바우의 색은 옅어지는데 오크는 진해지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두 목재가 세월이 흐를수록 닮아간다는 점에서 '나이 듦'이라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테이블과 바닥에 대한 오랜 기호가 하나 있다. 팔과 발의 가장 말단의 피부가 직접 반복해서 닿는 곳이 지나치게 딱딱하거나 차갑지 않아야 한다는 것.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와 탯줄을 끊은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팔 안쪽의 피부는 여전히 아기들의 볼처럼 보드랍고 연약하다. 장마철 무심히 발을 내디뎠다 온몸으로 찐득하게 들러붙는 바닥의 습도를 느끼게 되면 발바닥은 제3의 감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테이블과 바닥은 나무여야 하고 그 나무의 표면은 페인팅보다는 스테인 작업으로 마감되어 있기를 선호한다. 오랜 시간 앉거나 서서 작업을 할 때 접촉 부위는 기름과 땀으로 번지기 마련이라서 어느 순간 느껴지는 불쾌함을 나무 특유의 촉감이 상쇄해 주길 바라서이다.


내게 거실 테이블은 단순히 식탁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의자에 기대 스트레칭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일 밥과 빵을 차려먹고 차를 마신다. 음악을 틀어두고 창 밖을 보며 멍 때리거나 유튜브나 OTT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한다. 손님이 오면 특별한 음식을 차려내기도 하고, 겨울에는 김장을 하기 위한 작업대의 역할도 한다. 밥 먹는 거 빼고는 서재 책상과 다를 게 없네? 그리하여 테이블 위로는 꽤나 많은 전자기기들이 올라간다. 테이블 램프 전원선, 휴대폰 어댑터와 노트북 충전용 케이블에 일주일에 한 번은 옷을 다려야 하니 다리미 전원선까지 꼽을 곳이 필요했다. 선 정리의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처럼 상판에 매립형 콘센트를 설치하고 싶었으나 전문가의 손길(=공임비)이 필요한 건 둘째치고 차마 단단한 참나무 상판에 구멍을 뚫을 수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멀티탭을 테이블의 에이프런까지 끌어와 안쪽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각종 전자제품의 선을 연결시켰다. 몇 년 쓰다 보니 멀티탭을 고정시킨 나사가 헐거워져서 덜렁거리길래 다시 조여주고 느슨해진 케이블 선도 정리했다. 바닥의 멀티탭 선은 나무인 척 하지만 누가 봐도 플라스틱인 몰딩 속으로 집어넣고 나머지 선은 테이블 다리를 따라 3M 투명 전선 클립으로 고정시켰다. 계절에 따라 테이블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약간의 여유 길이를 확보해서 식탁을 이동할 때 선이 당겨지지 않도록 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바닥 몰딩 위쪽에 이전 몰딩의 흔적이 보인다. 저건 또 언제 지운담...


저질 체력으로 작업을 끝내고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 시피한 상태로 로봇청소기를 돌렸다.(이쯤 되면 전자기기의 노예 수준인가) 그런데 나름대로 최신형인 녀석이 몰딩 높이 1센티 넘는 것도 힘겨워한다. 얇은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한 몰딩이 걸레까지 달고 다니는 무거운 로봇 본체의 무게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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