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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어 Apr 16. 2017

KPI, 아 쫌!!(1)

성과지표, 생각 없이 만들면 사람 잡습니다.

그러니까 시작은 고객만족(CS) 팀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접수한 고객 불만이 얼마나 빨리 해결되는지를 성과지표(KPI)에 넣겠다고 한 거죠. 그게 자기 부서 KPI에 들어간다면야 그 결단을 칭송할 일이었겠지만, 어디 회사 일이 그렇게 굴러가나요?


회사는 이렇게 굴러갑니다. 갑자기 지시가 떨어지는 거죠. 각 부서에 얼마나 신속하게 고객 불만을 해결하는지를 측정하는 성과지표를 붙이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게요? 각 부서에서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지시가 있었다는 소문만 가지고 말입니다. 


"아니, 왜 지들 일을 우리한테 떨구고 XX이야!!"


회사가 쑤셔놓은 벌집이 되는 동안 KPI 담당자의 고민도 깊어집니다. 도대체 '신속한' 해결 시간은 며칠을 말하는 것이며, 몇 건이 신속하게 처리되면 잘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거죠. 게다가 성과지표 항목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늘여도 되는 건지도 의심스럽고 말입니다. 1) 2)


기획팀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갑니다. 팀장은 노발대발해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 옆에서 KPI담당자는 한숨만 쉬고 있고요. 귀찮은 일은 적당히 빠져나가자는 주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분들 손에 뭔가를 들려주지 않으면 CS팀의 일을 모두에게 떨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될 것 같습니다.


보고서를 하나 내야겠습니다. 워드 창을 하나 엽니다. 사내 보고서는 파워포인트 작성이 원칙이지만 몇 번 무시해 봤더니 별 문제가 없더군요. 어차피 소수의 사람들만 읽으면 되는 것을 굳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방법으로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슈가 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뭘 하라고 시켰는데 '그건 이래서 하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하는 제목을 달아봅니다. 


VoC(Voice of Customers) 처리 가속화를 위한 KPI 구성의 건


음... 순종적인 제목이군요. 맘에 듭니다. 이걸 들이밀어도 '지금 개기는 거냐?'라는 말은 안 들을 것 같군요. 전에 비슷한 말을 듣고 경영진 바뀔 때까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요. 두 번 다시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검토 배경을 적어 봅니다. 'CS는 중요하고, 그래서 책임 있는 부서의 KPI에 반영해야 한다'는 말은 꼭 들어가야 하겠죠? 그게 빠지면 '개기는' 보고서가 될 테니까요. 다음에 들어갈 말은 '합리적인 성과지표가 되려면 내가 만든 체계를 따라야 한다.'가 될 겁니다. 이걸 설득해 내는 게 핵심이죠.


이렇게 오프닝을 해 봅니다.

 

○ 고객 불만의 발생은 당사의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함
○ 따라서 고객 불만의 발생부터 해결 완료까지의 시간은 당사의 서비스가 중단된 시간으로 볼 수 있음


그냥 고객 불만 하나 생긴 걸 가지고 뭔가 어마 무시한 사태라도 벌어진 듯이 해석을 했습니다. '현업부서를 쪼자'는 윗선의 동기에 들어맞도록 맞췄습니다. 네, 직장인은 원래 영혼이 없습니다. 회사에 팔았거든요.


바로 뒤에 붙여서 '무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건건이 KPI를 구성하면 업무 수행의 초점이 흐트러지고,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관리 포인트가 늘어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 된다'는 말을 살짝 녹여 놓습니다. 쓰면서 '관리하기 힘들어요'에 힘을 좀 더 줍니다. 그러고 나서 '기존의 업무와 새로운 이슈를 화학적으로 결합시켜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설득해 봅니다. 


그러니까 OMTM(One Metric That Matters)을 개념을 살짝 언급한 겁니다. 다만 임원분들이 문자 쓰는 직원을 싫어하시니까 직관적으로 풀어쓴 겁니다. 


"뭐 하나 생길 때마다 KPI를 주렁주렁 달면 그거 다 평가하시게요? 에헤이~ 연말에 힘드실 텐데? 쉬운 거 만들어 드릴 테니 그걸로 가시죠?" (껄렁~껄렁~)


이렇게 말입니다. 


그럼 이제 지표를 던집니다. 


"고객 불편 지속시간 (Machine Hour 기준)"


이것만 가지곤 뭔지 와 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산식을 보면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산식을 이렇게 만들어 봅니다. 3)


"고객 불편 지속시간 = 누적 고객 불편 시간 / 누적 고객 서비스 시간 
                                = ∑(불편 발생 고객 수 × 불편 지속 시간) / ∑(고객 수 × 서비스 시간)
                                = ∑{불편 발생 고객 수 × (불편 해결일 - 불편 신고일)} / ∑(전월 말 고객 수 ×
                                       영업일) × (총 영업일 × 24 × 60 × 60)"
 
※ 초 단위로 측정 


몇 번 읽어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적용해서 몇 달 운영을 하다 보면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부 상품별로, 불편 유형별로 나눠 들어가다 보면 유행은 좀 지났어도 CS에 6 시그마도 도입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맘에 듭니다. KPI 담당자와 기획팀장에게 메일을 날립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기대한 해피엔딩은 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 주석 -

1) 사실 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KPI를 보면 구조가 좀 이상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측정지표는 매년 바뀝니다. 항상 새로운 것이 추가되고 있던 것은 사라집니다. 영업부서는 사업이 하나 생기면 지표가 하나 생기고 스텝부서는 뭔가 경영진에서 이슈가 된다 싶으면 지표 하나가 생깁니다.


2) 올해는 CS팀의 일을 빨리 처리해서 CS팀원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게 경영 이슈가 된 모양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윗선을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요? 배우고 싶은 노하우입니다.


3) 중단 없는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산업입니다. 그래서 영업일이 곧 서비스 지속시간이고요. 실제 제안한 산식은 이보다 약간 더 복잡합니다. 그걸 그대로 쓰면 곤란한 일이 생기겠죠? 그래서 단순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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