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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기동 일인가구 Sep 19. 2018

성북동 부쿠

 월요일이었던 어제, 부모님이 1박 2일간의 늦은 휴가를 서울로 오셨다. 점심때 즈음 만나기로 약속했고, 약속 장소인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아침 일찍 향했다. 



곧 추석이라서 안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늘상 마주하던 본가나 일터보다 바깥에서, 서울에서 만나는 건 조금은 색다른 만큼 더 반가운 일이다. 부모님은 지금도 워낙 서울을 자주 왔다갔다 하시지만, 이젠 여기는 그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내 공간이라는 느낌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져만 가고, 이렇게 내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나서 만날 때면 난 손님을 맞는 주인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반가운 재회를 나누고 나서 우린 이야기를 나누며 한적한 월요일 점심의 성북동 길을 한참 걸었다. 



엄마는 성북동 부쿠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유명한 북카페라며. 뭐, 난 어디든 좋았다. 어제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시원했고, 성북동은 한적하고 차분해서. 



한참을 걷고 나니 큰 고급 주택 같은 건물이 보였다. 강남 골목에 많던 정말 큰 개인주택과 외관은 참 비슷하게 생겼다. 간판은 따로 없었고, 입구 쪽에 큰 흰색 정사각형 현수막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1층은 북카페, 2층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2층에서 정말 맛있고 고급스럽고 또 비싼, 혼자서는 절대 안 먹을 음식들을 오랜만에 먹고, 1층 북카페로 향했다. 사실 북카페가 뭐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했지만, 여긴 좀 제대로긴 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서점의 진화는 반갑다. 온라인 스토어는 당일배송을 해 주고, 수많은 E-book 들이 만들어지는 지금의 시대에 단순히 책만 팔던 서점들은 각자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다. 카페와 접목시켜 음료와 디저트를 파는 건 이젠 오히려 평범하다. 한발 더 나아가 술집과 접목시켜 주류를 파는 서점들도 있는 마당에. 어떤 서점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대형 출판사에서 다루지 않는 책들만을 취급하고, 아트북만을 취급하는 서점, 만화만을 취급하는 서점, 일정 기간 소수의 책 몇 권만을 정해놓고 파는 무인 서점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실제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 톡톡 튀는 서점들에 비하면 오히려 성북동 부쿠는 정공법에 가깝다. 예쁜 인테리어와 분위기 좋은 공간에서 책과 커피와 차, 그리고 디저트를 파는. 사실 이것을 정공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부터가 시대가 변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그 공간은 그것을 능숙하게 해 낸다. 공간 자체는 생각보다 넓지 않지만 주인의 손을 거친 많은 책들이 있고, 그런 책들 하나하나에는 책을 이 공간에 들여놓은 동기나 좋았던 부분들 등이 책장 사이에 끼워진 얇은 필름지에 빼곡히 적혀 있다. 물론 그것이 단 한 명의 말이나 글은 아니겠지만, 그거야 어쨌든 그 필름지에 뭔가를 남긴 사람의 말에 공감하거나, 때로는 그러지 못하며 대화를 나누듯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좋은 아이디어처럼 보이고, 그리 어렵지 않은 사소한 일 같아 보이지만 막상 시행했을 때 결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낄 때가 간혹 있다. 이것도 난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많은 책들에 이런 수작업들을 해 놓은 건 그 자체로 참 대단한 일이다. 



내부 공간이 생각만큼 넓지는 않은데, 마당이 넓다. 서점이 건물 층 구분상으로는 1층이지만, 구조상 2층에 있는 형태이고 발코니에 넓은 마당이 있는 식이다. 설명이 참 어렵다. 가서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실히 알 거다. 마당에도 물론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들이 곳곳에 있고, 발코니 난간 바로 뒤에는 긴 책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높은 건물도 없어 시야가 탁 트인 조용한 성북동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오래 머물 일이 있다면 그 자리를 추천한다. 더구나 요즘 같은 날씨에는 말이다.    



커피 맛은 내가 사실 잘 몰라서 뭐라 판단을 못하겠고, 페퍼민트 티는 괜찮았다. 적당한 소음이 있어 오히려 편했고, 의자부터 책장 옆 사다리까지 소품 하나하나 각별히 신경 쓴 티가 났다. 열심히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 두 명이 보였었는데, 그 둘은 맘에 드는 사진을 결국 건졌을 거라 확신한다. 



책장들을 찬찬히 살피다가 영화로도 나왔던, 전부터 보고 싶었다가 잊고 지낸 소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눈에 확 들어오길래 바로 집었고, 박준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샀다. 그리고 나서 부모님 둘만의 데이트를 위해 난 빠져 줬다. 서점에 오래 있는 거 잘 못하기도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나 서점을 찾는다면 한 번쯤 가 보시길. 틀린 선택은 아닐 거다. 어제의 날씨 같은 날들이 당분간 지속될 것처럼 보이니, 성북동의 분위기 역시 어제와 같을 거고, 빵 봉투같이 생긴 손잡이 없는 종이봉투에 책을 담아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과 성북동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며 역까지 내려오던 어제의 나만큼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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