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나 한 권 살 것이지

by 새벽달

영어 시험 모의고사 책을 살 것이라고 서점에 갔다가 사실은 시집을 한 권 읽었다 핑계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었고. 자기계발서와 표지만 그럴 듯한 베스트셀러 에세이들 사이에서 시집 코너는 대체 어디에 있냐고 직원에게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정중하게 문의했고, 한켠에서 빳빳한 새 시집을 읽으며 책은 한권씩만 읽으라고 테이블에 써진 문구를 보고 고마워서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빵을 훔치는 도둑이 된 것 처럼 정독하기 미안하면서 결국 다 읽어낸 시집의 가격은 13,000원이었다, 아니 세상에, 어제 편의점에서 산 맥주 4캔은 13,000원이었고 서점을 나와 지하1층에서 내가 산 가장 싼 보드카는 12,000원이고 위스키는 15,000원이었다


시집은 날 슬프게 하지만 술도 날 슬프게 하는데 괜히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시집보다 1,000원 싼 보드카 한 병만 들고 오면서 내일 다시와서 시집을 읽어야지 그리고 매일 오면 어차피 술도 살거니까 1병을 사도 괜찮아 라고 혼자 말하는 이상한 의식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수치스러웠다. 아니 그만 수치스럽고 싶으니까 그냥 많이 읽고 많이 취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고 한정된 재화에 사람이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순 없는거니까 시를 쓴 사람의 마음이나 노력이나 세상의 사랑과 종말을 노래하는 그런 것보단 술의 가격이 합리적이니까 합리적 소비를 한 게 맞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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