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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작가 Apr 24. 2024

단순히 김치 냉장고 정리가 아니었다

가끔씩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를 함께 정리할 때가 있습니다. 친정에서 돌아온 후 반찬이나 물김치가 생겼을 때, 김장김치를 위한 넓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아니면 더운 여름을 앞두고 벌레와의 전쟁을 예견하여 쌀을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 글자 그대로 대이동이 일어납니다. 지난 월요일이 그랬습니다. 친정 아버지 생신을 다녀오면서 얻어온 반찬이 있었고, 더운 날씨를 피해 쌀을 보관하기 위해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냉장고 정리가 시작되었는데, 한참 동안 진행되는 동안에도 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정리의 시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보통 냉장고 안쪽 깊은 곳에는 오래된 것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서 급할 때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는 반찬이나 재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무심해지고 자연스럽게 기한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냉장고나 김치 냉장고나 할 것 없이 어느 순간 밀려난 것들, 밀려나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들이 가장 안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정리와 함께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 그제야 눈길이 갑니다. 기한이 만료되어서 버려야 하는지, 아직 먹을 수 있는 상태인지 뚜껑을 열어 살펴보게 됩니다. 아주 엄격한 심판의 얼굴을 하고서.     


하나씩 꺼내어 살펴봤습니다. 양은 많지 않으면서 큰 통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작은 통으로 옮기고, 기한을 훌쩍 넘긴 것은 과감하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옮겼습니다. 도무지 언제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정체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에 들었지만,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을 때의 상황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모든 선택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불필요한 것들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냉장고를 정리한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변화만이 아니라, 제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들을 마음속에 들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것 같았습니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 앞줄을 차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자각의 시간도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냉장고를 정리한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만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건네고, 그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시간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리는 결과가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을 발견하려는, 중요한 것만 남기려는 가능성 말입니다. 정리를 끝내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혼잣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지금을 위해 살아가는 거지.’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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