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입사 후 배치된 사무실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처음 경험하는 직장생활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였다.
사무실에는 두 가지 종류의 컴퓨터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93년에 샀던 486 모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한 세대 이후인 펜티엄 초기 모델이었다. 더 놀라운 건, 1인 1대가 아니라 2인 1대였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이 컴퓨터를 쓰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전화 업무를 보거나 서류 작업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이메일보다 팩스를 더 많이 쓰던 시절이었다. 번갈아 가며 컴퓨터를 사용해도 업무가 가능했던, 어찌 보면 '낭만적인' 시대였다. 아무리 그래도 낡은 컴퓨터를 돌려 쓰는 현실은 충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이 주재하는 신입사원 간담회가 열렸다. 다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컴퓨터 문제를 어떻게 얘기해 볼지 궁리했다. 사장님 말씀이 끝나면 신입사원이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때 컴퓨터 문제를 이야기해보면 좋을 거 같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컴퓨터가 너무 낡았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제조업이라 최신 컴퓨터가 필요 없다"는 식의 반박이 나올 수도 있었다.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반박할 수 없는 질문을 다듬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역시나 식사 후 사장님 말씀이 끝나자 사회자가 말했다.
"혹시 사장님께 드릴 말씀 있는 사람 있나요?"
그 말투에 '감히 나설 사람은 없겠지만'이라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준비한 대로 말했다.
"우리 회사가 제조업이지만, 컴퓨터로 인해 업무 효율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컴퓨터 수준은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입니다."
주변에서 살짝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사장님은 내 말을 끝까지 들은 후 예상대로 반박하셨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제조업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컴퓨터 없이도 도면을 그리고 배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해도 지장이 없었지."
순간 '아, 역시 예상 대로구나.' 싶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래도 검토해 보겠다."라고 덧붙였다.
그날 이후 회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간담회는 잊혔다. 어느 날, 부서에 새로운 컴퓨터가 지급되었다. '하긴 그럴 때가 한참 지났지.' 그렇다고 내가 사장님께 건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이미 컴퓨터 교체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기들을 만났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 덕분에 새 컴퓨터를 받았어!"
새 컴퓨터라니?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정작 나는 새 컴퓨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새로 들어온 컴퓨터를 설치하던 전산 담당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웬일로 신청한 수량보다 1대 더 들어왔네? 부장님 드려야겠다."
우리 부서에 컴퓨터가 1대 더 들어온 건 착오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 간담회 후 사장님의 지시로 신입사원 용 새 컴퓨터가 추가 배정되었을 것이다. 정작 나는 새 컴퓨터를 받지 못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모든 직원들에게 새 컴퓨터가 지급된 게 아니었다. 만약 신입사원인 내가 받았더라면 영문을 모르는 다른 선배들의 눈총을 받았을 거다.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같은 건의를 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런 당돌함은 신입사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10년 차 직원이 같은 건의를 했다면, 그건 좋은 건의가 되지 못했을 거다.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문제를 떠벌인 셈이 되었을 테니까. 같은 말도 할 수 있는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