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에는 진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3대 행사에 참가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4.18 마라톤이었다. 4.19 혁명 하루 전날인 1960년 4월 18일, 당시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것을 기리는 뜻깊은 행사였다. 나는 신입생 때 이 대회를 깜빡 잊고 놓쳤다. 그날, 도로를 달리는 학생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아쉬움만 삼켰다.
1년을 기다린 끝에, 다시 4월 18일. 학교 운동장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출발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대학생 시위가 예전 같지 않던 그 시절, 거리로 나서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학생들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학생들의 행렬은 쉽게 정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경찰이 막은 거였다. 매년 치러지는 행사라서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며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이렇다. 학생회는 ‘윤금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상여를 만들어 행진하려 했고 경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상여는 정문 앞까지만 나가는 것으로 합의되었다고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하나둘씩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행렬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는데, 혼잡한 상황에서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 눈앞에는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늘어서 있었다. 경찰의 통제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나는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경찰과 바로 대치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여기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뒤로 빠져야 하나?'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바로 앞에 대치한 전경과 눈이 마주쳤다. 철망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그 눈빛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분노, 짜증,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슬픔과 서러움까지. 단순히 시위를 막는 ‘공권력’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때는 그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의 차단이 풀렸고, 우리는 4.19 민주묘지까지 다녀왔다. 그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하지만 정문 앞에서 마주했던 그 알 수 없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군대에 갔다.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칠 무렵, 나를 포함한 일부 인원이 전경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속상했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시위를 막는 전경이 된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군대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전경대에 배치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우리 부대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예정된 도시로 출동했다. 전국에 이렇게 많은 전의경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많은 인원이 집결했다. 각 부대는 지정된 위치에 배치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이었지만, 방패를 들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대학생 무리에서 커다란 깃발이 보였다. 우리 학교 깃발이었다. 나는 진압복에 헬멧을 쓴 채로 그 깃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변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서 있는 자리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참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때 1년 전 마주했던 전경의 눈빛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눈빛.
‘그 사람의 마음이 딱 지금의 나와 같았겠구나.’
나는 방패를 든 채, 학교 깃발과 함께 멀어져 가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1년 전,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철망 사이로 마주하던 그 눈빛 속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