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 말 없이 따라나서는 친구

by 이진호

다들 군대 다녀오면 정신 차린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특히 더 절실했다. 8학기 안에 모든 학점을 채우려면 하루하루가 빠듯했다. 군대 가기 전 성적도 형편없었으니, 마음을 다잡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고,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학점과 취업을 위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도서관에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험이 임박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하기는 당시에는 거의 매주 전공 시험이었으니 시험기간이 아닌 날이 없었다.


그때 한 친구가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동기들 중에서도 더 가까웠던 우리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조용히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 한잔하러 가자."


시험을 앞두고 다들 집중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을 잘 알면서 술을 마시자고 할 친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이유가 있겠구나. 이럴 정도로 힘든 상황이라면 공부를 핑계로 외면할 수는 없는 거지.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는 자주 가던 허름한 소주집으로 향했다. 누구도 먼저 묻지는 않았다. 소주잔이 한두 번 오간 뒤,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부모님 사이가 요즘 너무 안 좋아. 심각해."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시험 앞둔 친구들을 불러냈을까?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저 들어주고, 곁에 있어 주는 것밖에는.


그날처럼 조용하고 진지하게 술을 마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별말 없이 함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지내던 우리는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갔다. 그날 우리를 불러낸 친구와 또 다른 친구는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 오는 건 몇 년에 한두 번 정도다. 그때마다 우리는 꼭 시간을 내서 만났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명절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자주 모이는 게 행복이지."


몇 년 전부터는 굳이 명절이 아니라도 시간을 내 모임을 만든다. 함께 운동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사는 얘기와 옛날 얘기를 나눈다. 어느덧 우리는 반백 년을 넘게 살았다. 학점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무게를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이 더 소중한지 안다.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그래서 누군가라도 모이자고 손을 들면, 우리는 열일을 제쳐 두고 모인다.


그날, 도서관에서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겼던 것처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철망 사이로 뒤바뀐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