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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빈 Nov 15. 2020

혐오감을 드러내면 오히려 자신이 수치스럽다

무작정 진영논리로 말하지 말자


나도 가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울컥한다. 내가 속한 정치적 진영에 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특히 그렇다. 박정희의 공을 이야기한다거나, 전두환의 공을 이야기할 때. 특히특히 그렇다. 나에게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이고 살인자니까.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도 노동문제 앞에서는 그런 평가를 듣는 일이 있다.


빛나는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듯, 정치인도 사람이다. 그리고 그 업적에도 공과 과가 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과를 이야기하거나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공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가 나온 맥락은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혐오감정을 일으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살면서 사실상 처음으로 혐오감정을 무고한 상대방 앞에서 펼쳐냈던 어떤 어린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반성한다.


그 날은 중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시기의 어느 오후였다. 집에 혼자 있었고, 누군가 벨을 눌렀다. 신문구독 요청 방문이었다. 동아일보인지 중앙일보인지 하는 신문을 보시면 어떻겠냐는 중년 아저씨의 말씀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라(나도 마찬가지) 현관에 떡하니 “조선일보 반대”스티커를 붙여놓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아저씨 저희 집 안티조선해요. 스티커 안 보이세요?”

아저씨가 선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희 신문은 조선일보 아니에요. 중앙(동아)일보니까 한 번 부모님께...”

나는 다짜고짜 화가 나서(왜 화가 났을까..), 아저씨 말을 끊고 언성을 높였다.

“조중동이 다 똑.같.죠.뭐. 저희 그런 거 안 봐요.”

그리고 아저씨가 뭐라 말하려는데 인터폰을 끊어버렸다. 끊자마자 번뜩 정신이 들고 수치심이 몰려왔다. 무례했다. 이 아저씨 개인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닌데.
너무 놀라 화면을 켰다. 아저씨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멈칫 서 있다가 한숨 쉬며 돌아섰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소비자라는 이유로 구독 요청을 하는 판매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조중동 반대라는 막연한 구호를 빌미로 말단의 사람에게 폭력적으로 굴었다.

수치스러웠다.

그런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목구멍부터 눈물이 차오른다.

지금도 물론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말들에 과잉되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으면, 밖으로 꺼내 생각을 말할 때 이 감정을 들여다보고 상대방의 진짜 말이 뭔지 알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극복하지 않으면 나는 두고두고 내가 남긴 말에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조심해야 하고, 느슨해질 때마다 신경 써야 한다.

나도 농담처럼 친한 사람들과 특정 문제들에 혐오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다. 문제라는 것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돌이켜도 쉽지는 않다. 그래도 나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한다. 거기 있는 사람을 들여다봐야 한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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