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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Mar 11. 2019

마음의 준비 (1)

요새 꿈에는 자꾸 큰 파도가 나온다.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엠마뉘엘 카레의 소설 <나 아닌 다른 삶>에서 읽은 듯한 집채만한 파도. 앞뒤 맥락 없이 어느 순간 수직으로 세워진 파도 앞에 작은 서핑 보드에 의지한 내가 있다. 실제의 나는 서핑은 커녕 수영도 못한다. 어렸을 적 엄마가 나에게 '너는 산과 바다 중 뭐가 더 좋니'하고 질문했는데, 나는 망설임없이 '산'이라고 답했다. 바다는 무섭기 때문이다. 꿈 속의 나는 넘실대는 파도에 다 포기한 채로 실려있다가 다가오는 파도를 맞이한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순간 장면은 전환된다.


주말에 예수수도회에서 연 침묵피정에 다녀왔다. 온수역 근처에 있는 고즈넉한 수도원이었다. 입구에는 부설유치원이 있는데, 걸어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피정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잘 다녀오라고 달력에 표시까지 해놓고 기도해 주겠다던 엄마 생각이 났다. 마중 나오신 수녀님이 이틀간 쓸 개인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좁고 긴 독일제 문을 열자 아담한 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소박하고 정갈하기 그지없는 그 방을 보니,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매트리스 없는 나무 침대 하나, 그 위에 걸린 나무 십자가, 성경 책과 노트 하나 올려놓으면 가득 차는 너비의 나무 책상 하나, 그 앞에 놓인 작은 의자, 사물함 정도 크기의 옷장 하나가 생활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방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원의 이 작은 방이 정말 그리웠다.


침묵피정은 이번이 두 번째다. 약 10년 전쯤 수능시험을 마치고 한 수도원의 침묵피정을 다녀왔다. 그 땐 네 밤인가 다섯 밤을 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일주일간 침묵하며 명상하는 비종교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선생님이 해본 건 뭐든 다 해보고 싶었던 마음 더하기, 끊임없이 재잘대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며칠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큰 도전처럼 느껴진 측면이 있었다. 혹시 피정 공고가 날까 주보의 작은 글씨까지 꼼꼼히 읽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비용이 적지 않았지만 모아둔 돈이 참가비에 딱 들어맞아 큰 맘 먹고 신청했다. 피정은 생각보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었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 읽고 묵상하고 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과 굳이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으니 말을 못해서 입이 근질거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인상적인 기억은 피정 마지막 날, 침묵을 풀고 각자에게 일어난 일들을 나누는 시간에 머물러있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날들을 기대하며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여했던 나와 달리, 그 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 분 정도를 빼면 전부 삶에 지치고 좌절하고 비통에 잠긴 내 부모뻘 이상의 어른들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후 한두달쯤 후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들뜨기 전문가인 나답지 않게 이 피정의 분위기를 마음에 깊이 담고 이사를 했다. 기숙사에 둘 짐을 싣고 밤늦게 서울에 도착해 마포대교를 건널 때 까지도 나는 도무지 들뜨거나 설레지가 않았다. 아빠는 강변북로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못 찾아 마포대교를 다시 건너갔다. 두 번쯤 왕복하며 영산강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은 한강을, 한강에 비친 건물의 불빛들을 바라보는데 하나도 멋있지가 않았다.)


수녀님은 열 명이 조금 넘는 참가자들에게 가장 먼저 수도회를 소개했다. 수도회마다 만든 사람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추구하는 바나 중점으로 두는 활동이 다르기에 이 곳은 또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수녀님은 1600년대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말했다. 바로 그 시대에 메리 워드라는 한 여성이 있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수녀회에 입회했는데, 당시의 여성수도회는 남자수도회와 달리 봉쇄수녀원에서 기도만 해야했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메리 워드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단지 그것만이 아님을 알았다. 밖에서 나돌아다니는 여성들이 무슨 수도생활을 하는 거냐는 온갖 비난과 공격에 맞서며 세상 속에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성만이 맡아온 여성수도회의 장상까지도 여성이 맡아가며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공동체를 이끌기도 했다. 특히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사업에 헌신했으며, 이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간 동료들을 '열린 원의 동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고 <"여성수도자"의 틀을 바꾼 사람>) 


나는 이 곳에 고요함을 찾아 왔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장이 마구 나대기 시작했다. 그 날은 마침 '세계 여성의 날'의 다음날이었다. 여성수도회가 감히 수도회 이름에 "예수"를 쓰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예수수도회'란 이름을 불허당해서, 2000년대 이후 들어 지금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고, 그 동안에는 '동정성모회'라고 불렸다고 한다. 내가 졸업한 대학은 '예수회'라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대학에 오기 전에는 그런 수도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예수회를 만든 이냐시오 성인도 알고 나니 참 매력적인 분이었다. 특히 이 분이 고안한 영신수련(spritual exercise)이라는 기도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데 메리 워드가 당시 영신수련의 방식을 채택하자 예수회원들이 심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위에 링크한 글에 나옴) 화가 났다. 대학 시절 예수회원으로서의 삶에 매력을 느껴도 여성인 내게는 고민해볼 여지도 없음에 좌절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뿌리가 깊다못해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기세인 교회의 남성중심성에 화가나서, 한동안 성당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이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교회를 초월한 무엇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하느님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보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거였다. 특히 올해 나는 생각을 정말 깊게, 깊게 해야 하는 일들을 앞두고 있다. 그간의 활동을 아주 구체적으로 복기하고,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붙들어매지지 않아서, 수녀님의 표현대로 '양동이 속의 출렁이는 흙탕물' 같아서, 내가 진실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이기적이게도 그제서야 하느님이 보고싶었다. 우리 사이는 마치 크게 싸운 건 아니지만 새 친구들과 새로운 일들에 신경을 쏟느라 관심이 멀어지더니 연락이 뜸해져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관계가 되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수녀님이 죽은 듯한 핸드폰을 걷어가시고 피정이 시작됐다. 무언가 포근한 기운에 감싸인 채, 방에 덩그러니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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