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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eca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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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우정 Dec 16. 2020

<현기증>, 영원히

데카당스(DECADENCE;) 2호

영화 <현기증> 줄거리 :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 형사는 범인을 검거하는 현장에서 지붕에 매달리게 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던 동료가 떨어져 죽게 되자 고소 공포증이 생긴다. 이 사건으로 은퇴한 스카티 형사에게 옛 친구인 개빈으로부터 망령에 씐 것만 같은 부인, 매들린(킴 노박)을 미행해 달라고 한다. 스카티는 사립탐정으로서 어딘가에 홀린 듯한 매들린을 미행하게 되고 알 수 없는 미지와 미로 같은 매들린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매들린을 또다시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되고 이후에 매들린을 꼭 닮은 주디라는 여성을 길에서 마주하게 된다.

<현기증(Vertigo)>은 영원에 대한 권태와 감각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또한 예술이 존속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히치콕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데카당하고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시체 성애)적인 <현기증(Vertigo)>은 히치콕이 평생을 천착한 어떤 미(美)의 궁극과 그런 이데아에 대비되는 현실의 괴리를 시각적 특수효과를 사용해서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다. 영원에 대한 감각, 영원 또는 절대에 대한 갈구, 이런 갈구에 대한 히치콕의 내밀한 고백과 여정을 위해 다음 몇 가지 키워드로 영화를 기록하고자 한다.


* 현기증의 색

* 소용돌이 속으로

* 죽음애, 사랑이라는 환상, 그리고 예술



현기증의 색


<현기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비되는 두 색일 것이다. 녹색과 빨간색. 전반부와 후반부의 색. 스카티가 처음 매들린을 식당에서 마주했을 때 매들린이 입고 있던 드레스와 스카티가 홀린 듯 매들린을 미행할 때의 매들린의 자동차... 온갖 소품과 조명이 녹색을 주조로 하고 있다. 매들린이 가진 상류 지향의 분위기와 고고함, 망령에 사로잡힌 유서 깊은 가문의 여인, 거기서 오는 신비와 초월적인 매력이 녹색에 깃들여 있다. 녹색은 또한 죽음의 색이기도 한다. 죽음의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의 주변은 온통 은은한 녹색이 지배한다. 매들린의 먼 조상이라는 칼로타는 이미 죽은 지 백 년도 더 된 사람이다. 이렇게 칼로타의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은 죽음의 세계에 있는 칼로타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금문교 앞에서 자살까지 시도한다.


온통 녹색에 지배된 이 여인, 죽음에 사로잡힌 매들린이 샌프란시스코 만에 몸을 던졌을 때,  스카티는 그녀를 구하고 그의 집으로 매들린을 데리고 간다. 스카티의 집에서 깨어난 매들린은 붉은 가운을 입는다. 차가운 회색의 정장을 벗고 붉은색의 옷을 입은 매들린은 스카티와 이야기를 나누며 매들린으로서 스카티와 처음 마주하며 그와 사랑에 빠진다. 생명과 삶의 영역으로 돌아온 매들린.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이 '진짜 매들린'으로 깨어날 때 입은 옷이 붉은 색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교회에서 매들린이 종탑으로 올라가 자살을 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스카티는 매들린을 뒤따라 갔지만 고소공포증 때문에 그녀를 구하지 못했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현기증의 트라우마는 더욱 심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반 폐인이 되어 살아가던 스카티 앞에 거리의 여인인 쥬디가 나타난다. 쥬디는 매들린과 너무나 닮았고 쥬디를 따라온 스카티는 그녀를 쫓아간다. 이때 쥬디는 붉은색의 단발머리를 한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다. 평소에도 정장을 입고 금발 올림머리를 한 상류층 분위기의 매들린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길거리 장면에서 쥬디는 녹색 옷을 입고 있는데 마치 이 색은 이계(異界)로, 환상으로, 죽은 자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듯한 이정표와 같다. 때마침 쥬디가 묵고 있는 엠파이어 호텔의 간판도 녹색으로 빛나고 있다.

후반부 쥬디의 본래 머리색인 붉은색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스카티가 매들린을 처음 본 식당에 쥬디를 데려가는 스카티. 식당의 붉은색의 강렬한 벽지가 인상적이다. 혹자가 말하듯 초록색이 '꿈이자 환상'으로서의 '허상'을 뜻한다면 그에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상은 '현실'로서의 붉은색이리라. 그렇다면 칼로타의 목걸이 색깔은? 가장 옛날의, 가장 오래된, 가장 심층의 '환상'인 칼로타의 목걸이 펜던트 색깔이 붉다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자각 내지는 경종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초록과 붉은색이 시각적으로 중첩되며 가장 강렬하게 대비를 이루는 건 어딜까? 초록의 색이 지배적인 전반부, 붉은색의 색감이 주요한 후반부 말고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부분은 다름 아닌 메들린이 죽은 다음, 쥬디를 만나기 전 중반부 지점, 스카티의 꿈 장면이다. 스카티는 꿈에서 붉은색 꽃다발의 만화의 형식으로 녹색 조로 변하는 걸 누워서 바라보고 매들린의 남편이 붉은빛으로 일렁이는 칼로타와 서 있는 걸 지난 현실의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그런데 기억의 삽화 끝자락에는 갑자기 칼로타의 초상화가 나온다. 이윽고 클로즈업되는 칼로타의 붉은 목걸이. 점차 화면은 붉은색으로 점멸한다. 그리고 스카티는 칼로타의 초상화를 향해 조금씩 걸어가고 칼로타의 무덤이 나온다. 화면은 계속 붉은색으로 번쩍인다. 온통 초록과 붉은색이 난무한 화면, 심지어 만화적 화면까지 뒤섞인다. 초현실적인 기법이 난무한 이 꿈 장면, 칼로타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붉은색이 침범한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꿈. 그러나 꿈에서 스카티가 마지막에 마주한 건 그렇게 사랑하던 매들린도 아니요, 매들린 다음에 만날 쥬디도 아니다. 실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1세기 전의 인물, 칼로타다.


여기서 영화적 진실이 드러난다. 바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 죽은 자와 자고 싶다는 그 욕망 말이다. 이왕이면 가장 심층의, 가장 고전적인, 가장 오래된 인물인 칼로타와 말이다. 빨간색이 점멸하고 녹색이 손짓하고 이윽고 보라색으로 화면이 연속되며 꿈에서 깨어나면 영화는 후반부로 진입한다.


스카티는 삶의 목적성을 잃어버린 채 우연히 만난 쥬디를 그의 네크로필리아적 욕망의 산물로 만들어 버린다. 매들린이 입었던 옷, 매들린의 네일 칼라, 매들린의 머리색, 그리고 쥬디가 마지막까지 거부했던 매들린의 올림머리까지... 쥬디가 호텔의 녹색 네온사인이 온통 침범하는 환상의 무대에서 매들린으로 한 단계 들어오자 스카티는 거침없이 그녀를 향해 키스를 퍼붓는다. 네크로필리아인 스카티는 이미 죽은 매들린으로 완벽히 분한 쥬디를 보고서야 성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교의 은유인 키스, 그 이후에 스카티는 이 네크로필리아와 피그말리온(Pygmalion effect; 자신의 조각을 사랑했던 조각가의 일화를 다룬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용어)적 욕망이 뒤섞인 채 쥬디를 대하고 쥬디는 매들린으로 분한 채 칼로타의 목걸이를 찬다. 이 목걸이를 걸어주던 스카티는 그것이 칼로타의 것임을 알고 까닭 모를 분노 또는 자신이 속았다는 까닭 있는 분노 또는 정염이 폭발하게 되고 그의 가장 심층에 있는 성적 욕망에 불을 지핀다. 다짜고짜 쥬디를 매들린이 자살한 성당으로 내몬 스카티는 매들린의 위장된 죽음에 대해 하나하나 캐묻고 칼로타의 목걸이에 자극된 분노와 정염으로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현기증, 즉 고소공포증마저 극복한다. 이윽고 쥬디를 성당의 종탑으로 끌고 가서 그녀를 질책한다. 그때 검은 실루엣의 수녀가 나타난다. 이를 보고 진짜 개빈의 부인인 매들린의 심령으로 오인한 쥬디는 뒷걸음치다가 종탑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스카티는 망연자실하게 종탑 아래를 바라보면서 결코 이룰 수 없는 네크로필리아적 욕망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붉은 칼로타의 목걸이가 불러온 참사. 칼로타의 목걸이가 붉은 이유는 스카티의 가장 심층에 있는 환상이 스카티에게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슬픈 진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칼로타의 붉은 목걸이를 차지 않았더라면 쥬디는 매들린의 가면을 쓰고 스카티와 오래 함께할 수 있었을까? 붉은색(쥬디)>녹색(메들린)>붉은색(칼로타의 목걸이), 붉은색과 녹색의 교차, 그리고 보라색(칼로타)으로 들어가는 꿈의 대비는 영화에 심도를 부여하고 영화적 의미와 시각적 재미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만은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녹색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스카티의 눈동자 색이다. 영화는 유독 스카티의 눈동자 색이 잘 드러나도록 촬영했는데 이는 누군가를 응시하고 미행하고 사랑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다시금 절망 속에서 헤매는 현실 속의 스카티가 언제나 ‘환상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제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마치 카메라의 눈 같다. 카메라와 같이 매들린, 칼로타, 쥬디를 찾아 헤매던 그의 녹색 눈은 “영화는 환상이다”, “사랑은 환상이다”라는 명제를 가장 시각적으로 드러내 주면서 그럼에도 ‘사랑’, 즉 ‘영화’라는 환상을 좇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녹색 불빛과 같이 환상 속의 그대, 영화 속의 그 여인, 꿈속의 그 사람은 내가 딛고 있는 이 현실의 비루함과 권태를 잊게 한다. 그래서 예술이 있고 영화가 있고 꿈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어떤 녹색의 잔영, 그 위태로운 빛깔에 매혹되어 현실 감각마저 조금씩 일그러진다. 끝내는 파멸하게 만드는 어떤 환상. 그것이 히치콕이 그려내고 싶었던 예술에의 ‘현기증’이 아닐까.



소용돌이 속으로...


‘현기증을 시각화하는 것’이 영화 <현기증>의 가장 큰 과제인 만큼 영화 속에는 현기증의 증상, 즉 어지러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소용돌이 모양의 올림머리, 스카티의 고소공포증, 꿈,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 전체가 소용돌이 형상을 하고 있다. 먼저, <현기증>의 배경은 샌프란시스코다.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이 도시는 영화 속에서 독특한 공간미를 보여준다. 촬영기법을 광각으로 담으면서 현기증을 형상화하듯 스카티와 매들린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성당으로 향할 때 소용돌이 모양으로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담았다. 가장 크게 소용돌이, 현기증이 형상화된 장면이다.


스카티의 꿈속에서도 현기증은 계속된다. 등장하는 매들린의 눈이 자줏빛으로 빛날 때 소용돌이 모양으로 시각화되고 스카티의 몸 전체가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모습이 나온다. 온통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꿈은 현실에서도 내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의 처음 장면을 떠올려 보자. 스카티가 고소공포증을 얻은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런 소용돌이, 감각의 뒤틀림, 즉 현기증의 왜곡된 시각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영화는 매들린이 자살하는 성당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에서 밑에서 위로 찍어서 천장이 보이게 하였고, 한편으로 멈추어서 계단 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위에서 밑으로 찍으면서 공간이 심하게 뒤틀리는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며 나선형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인물 구도도 마찬가지이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과 후, 중간중간 ‘미지’라는 여성은 코러스처럼 나선의 제일 바깥에서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사건과 인물의 행동은 두 번씩 반복된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미술관에 두 번 가고, 편지를 두 번 쓰며, 꿈을 두 번 꾼다. 나선형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다시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형태다. 엠파이어 호텔에서 키스를 할 때도 화면은 나선형으로 돈다. 이렇게 영화는 계속 나선형을 그린다.


동료 경찰의 죽음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일어나는 공간적 뒤틀림은 작게는 사다리 위에서부터 크게는 매들린의 죽음을 목격하는 성당에서까지 지속되는데 애초에 ‘현기증’ 트라우마 때문에 스카티가 모든 음모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시작할 때부터 어지러움증, 현기증, 고소공포증이 일으키는 어떤 존재의 흔들림과 불안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 불안은 바로 죽음에의 공포이자 인식이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원형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현기증, 즉 죽음에의 이끌림, 죽음이라는 중심으로 가는 영화의 진행에 반작용으로서, 즉 현기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무질서를 질서 상태로 바꾸려는 개인의 몸부림으로서 스카티는 영화 말미에 매들린의 의상을 입은 쥬디를 데리고 트라우마가 중첩된 성당으로 향한다. 여기서 쥬디를 탑 꼭대기로 내몰면서, 현기증에 무방비로 노출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주체로서 ‘스카티’라는 개인이 이끌어가는 현기증이라는 불안과의 정면충돌은 잠시나마 스카티의 병적 증상을 사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현기증을 해결하고 자신을 둘러싼 음모의 종지부를 찍고 ‘주체’로 살아가려던 스카티는 수녀의 그림자를 보고 겁에 질려 창밖으로 뛰어내린 쥬디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고 망연자실한 스카티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의 현기증은 완전히 사라진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쥬디의 죽음으로 다시 현기증과 고소공포증에 시달리게 될까?



죽음애, 사랑이라는 환상, 그리고 예술


<현기증>은 철저히 네크로필리아에 대한 이야기다. 죽은 여자에 대한 성애. 표면적으로는 자살한 매들린에 대한 사랑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칼로타’라는, 가 닿을 수 없는 시대의 여인에 대한 성애를 그리고 있다. “죽은 여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 욕망은 소용돌이처럼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현기증처럼 불안한 걸음으로, 화면으로 이어지며 기이한 서사를 만든다.


특이할 점은 미스터리로 활용할 수 있는 “매들린은 가상 인물이며 쥬디라는 연기자가 연기했다”라는 설정을 영화는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부 쥬디가 스카티에게 편지를 쓰면서 유령에 홀린 매들린이라는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는 사라지고 서스펜스로 장르가 바뀐다. 한편으로는 편지를 쓴 것을 스카티에게 전달하지 않고 찢으면서 “스카티만 모르는 상태”로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한다. 관객에게 정보의 권력이 이양된 것이다.


하지만 서스펜스로 극이 바뀌었음에도 진실을 모르는 이 스카티의 행동은 여전히 불안함과 위태로움을 자아내면서 관객을 긴장시킨다. 스카티는 쥬디에게 매들린이 입었던 것과 똑같은 회색 양복을 입히고 구두도 똑같은 구두를 신기고 네일을 하고 화장을 시키고 한사코 거부한 올림머리까지 똑같이 하도록 만든다. 신화 속 조각가 피그말리온(Pygmalion effect)처럼 여자를 원하는 대로 치장하고 행동거지마저 죽은 매들린을 따르도록 한다. 피그말리온과 차이가 있다면 사물에 생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과는 달리 산 사람에게 죽은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즉, 죽음에의 욕망이다. 이런 죽음에의 욕망은 서스펜스를 더욱 서스펜스답게 한다. 매들린이라는 죽은 여성을 쥬디에게서 재현하려는 욕망이 주는 긴장감은 칼로타의 목걸이를 차고 있는 쥬디를 스카티가 발견한 순간 극도로 치 닿는다. 스카티가 원하는 것은 더 심층적인 죽음인 것이다. 칼로타 발데스. 그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의 사람. 매들린보다 더 오래된 죽음. 고전적인 죽음.


매들린과 칼로타라는 죽은 여성에 대한 성애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 즉 죽음애와 맞닿아 있다. 죽어서 완벽한 여자. 죽었기에 대체할 수 없는 사랑. 죽음애의 본질은 ‘죽음’ 자체에 대한 매혹이다. 다른 말로 시체 성애를 뜻하는 네크로필리아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대로 행동하게 하고 원하는 복식을 취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 ‘거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사랑. 자신이 ‘감독’할 수 있는 사랑. 그러므로 ‘죽음’은 네크로필리아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죽은 자와 자고 싶다는 것.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이 꿈은 환상이다. 결국 히치콕이 그리고 싶었던 건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죽음애’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주인공인 스카티의 여정을 통해서 영화라는 예술의 속성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순간을 담는 예술이다. 순간을 필름 속에 영원히 담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를 볼 때는 언제나 과거에 촬영된 어떤 순간을 본다. 과거의 순간을 현재에 본다는 것. 영화 속에 배우들과 공간의 모습은 촬영된 시점 그대로 배우가 죽고, 공간이 없어져도 계속 필름 속에 남아 있으며 이는 필름이 보존되는 순간까지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남는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50년대의 어느 한순간을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인물들과 공간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것. 고전을 사랑하는 것. 필름으로 남는 어떤 영원한 순간을 사랑하는 것. 참으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이다. 히치콕은 네크로필리아적 욕망을 영화적 순간, 영화적 애정으로 승화하여 표현한 것일까? 스카티의 눈은 녹색으로 형형하게 빛나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사랑을 카메라가 되어 쫓는다. 영화적 순간. 찍는 이후에는 언제나 과거에 머무는 예술. 그러나 영원한 과거. 그런 죽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히치콕만의 향취. 참으로 고전적인 사랑이다. 아니, 고전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 히치콕의 영화들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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