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조앤 디디온《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최근에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을 읽고, 에세이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폭주했다. 이 책에 리베카 솔닛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 자주 겹쳐보였다. 어지러이 길을 잃는 느낌, 그 길을 잃는 느낌에 나를 맡기는 이상한 매력. (《멀고도 가까운》은 인생책 중 한 권이다.) 솔닛이 다시 읽고 싶어서 《길 잃기 안내서》를 샀다. 읽다보니 언젠가 빌려 읽었더라. 그래도 또 좋았다.
책에서 독특하게 느껴졌던 지점 중 하나. 아, 자기의 가족사를 이런 방식으로 서술할 수 있구나! 최근 한 북토크에서 "치료 내러티브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해에 상당히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내러티브 외에 자아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 역이 유년기의 한 사건을 한 사람을 해석하는 절대적 잣대로 삼는 것에 반대하면서 이 책에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보고자 애썼지만, 여전히 유년기의 사건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복잡한 처지에 있고 그 복잡함이 글에도 드러났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 치료 내러티브 외에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치료 내러티브에 기대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얼마전에 를 읽으면서 가족사를 이런 식으로도 서술할 수 있겠구나 하는 레퍼런스를 얻었다."
그 집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벌여졌다. 그러나 딱히 특이하거나 흥미로운 일들은 아니었다. 심리치료사가 그런 이야기를 한 시간 들어주는 대가로 큰 돈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만 말해두면 충분할 것이다. (...) 이야기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선물이 될 수 있고, 미로가 될 수도 있고, 미로 속의 게걸스러운 야수 미노타우로스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길잡아 방향을 찾지만, 가끔은 이야기를 버려야만 탈출할 수 있다.
《길 잃기 안내서》, 252쪽
가족사와 관련해 수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지만 “그 집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벌여졌다. 그러나 딱히 특이하거나 흥미로운 일들은 아니었다.”라고만 서술하는 담담함. 그 담담함은 “우리는 이야기를 길잡아 방향을 찾지만, 가끔은 이야기를 버려야만 탈출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수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닛은 자기 이야기를 짧고 담담하게 끝내는 대신 수많은 이야기를 어지러이 펼쳐놓는다. 자아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을 표현하는 대신 세상을 기준으로 동쪽 서쪽을 표현하는 한 부족의 이야기, 인디언 부족에게 잡혀 몇십년을 살다 자신이 이전에 몸담았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음을 깨닫고 계속 인디언으로 살아가는 미국인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솔닛은 길을 잃었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명제적이지 않은 형태로 풀어낸다.
"우리가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엇이야말로 종종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는 일은 길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문장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인생의 잠언이었다. 내게는 공부론 혹은 예술론처럼 읽히기도 했다. 공부나 예술은 결국 가볍고 날래야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길을 잃을 수 있으려면 고정관념이나 신념, 정형화된 이론이나 담론이 굳어있지 않아야 하고, 그래야만 무언가 소중한 것들을 새롭게 찾을 수 있으니까.
길을 잃는 것, 그것은 관능적인 투항이고, 자신의 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고, 세상사를 잊는 것이고, 지금 곁에 있는 것에만 완벽하게 몰입한 나머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는 것이다. 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길을 잃는 것은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고,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냥 길을 잃었다(get lost)는 표현 대신 자신을 잃었다(lose oneself)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에는 이 일이 의식적 선택이라는 사실, 스스로 택한 투항이라는 사실, 지리를 매개로 하여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신 상태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엇이야말로 종종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찾는 일은 길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길 잃기 안내서》,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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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디디온의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도 《에세이즘》으로부터 시작된 독서. 조앤 디디온이 그려낸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 현장. 지금, 여기를 스스로의 고정관념 없이, 경직된 사고 없이 그리자 부분적 실체가 드러난다. 가장 놀라운 글은 표제작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반문화 십대에게서 저항이나 대안이 아니라 표류와 무사유 같은 것들을 본다. 당시 대부분의 진보언론이 그러했듯 ’저항‘과 ’대안‘의 틀에서 보려고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조앤 디디온은 반문화 현장에서 희망을 보기보다는 병리적 문제를 보았고 그걸 가감없이 쓰고자 했다.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 현장을 누빈 이 글들에는 자기 연민과 자기망상으로 얼룩진 감상성을 “자아를 달래주는 동시에 마비시키는 도덕적으로 파산한 체계”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는 조앤 디디온의 날카로움과 꼬장꼬장함이 가감없이 느껴진다.
물론 활동가들-사고가 경직된 사람들 말고 창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으로 혁명에 접근하는 이들은 언론이 놓치는 진실을 이미 오래전에 포착했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보고 있었다.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본 이상, 그 진공 상태를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원자처럼 쪼개지는 사회를 복구할 수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정확히 주어진 대로 피드백을 한다. 단어를 믿지 않기 때문에-체스터 앤더슨은 단어란 "먹물"용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단어가 필요한 생각은 역시 잘난 척에 불과하다고. 이 아이들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어휘는 이 사회의 진부한 표현들이다. 사실 나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결손가정" 출신이라는 표현에 만족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열여섯, 열다섯, 열네 살이다. 나이는 항상 어려진다. 거대한 청소년 군단이 명령 대신 단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역자 후기도 좋았다.
디디온의 정직한 ‘진실’은 아주 특정한 시간, 아주 특정한 공간에서 발현하는 현상에만 적용된다. 시대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장소성 또한 불가결하다. 진실은 오로지 특수한 지역성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 있다. 도너 파티의 역사를 품은 캘리포니아의 금욕적 태평함, 청춘의 파티장 뉴욕, 맥락과 사회로부터 실종된 아이들의 샌프란시스코, ‘격식’을 꿈꾸며 ‘키치’와 타협하는 서글프고 추레한 낭만의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화려하게, 현란하게, 독보적으로 비사회적인” 반영웅 하워드 휴스의 헐리우드, 전쟁의 상흔을 품은 자본주의의 관광지 하와이, 수형자들이 사라진 앨커트래즈, 《뉴요커》가 “지난 60년간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에세이 선집”이라 추앙한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디테일한 구체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은 지극히 ‘로컬’한 글이고 그렇기에 지금 여기, 2021년의 대한민국에서도 그 ‘진실’이 힘을 잃지 않는다.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339-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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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의 문장들이 겹쳐졌다. 정희진 선생은 폭력에서 쾌감을 느끼는 여성의 인터뷰를 하며 당황한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쾌감을 느꼈다는 건 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의 입장으로 느껴지고,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불쾌한 말이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거다. 하지만 선생은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자기 심정을 표현하고, 그녀의 세계관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석하려고 한다. 연구자의 사고 방식에 연구 대상의 경험을 가두지 말고 연구 대상의 시각에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유명한 이론 중 하나가 '학습된 무기력'인데, 선생은 이 이론에 짜맞춘 연구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피해 여성이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폭력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이론을 대입해 피해 여성을 보면 실제 무기력하지 않아도 무기력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거다. 잘 알려진 이론이나 담론에 현실을 끼워 맞추지 않으려면, 내가 페미니스트이더라도 페미니스트인 걸 어느 순간 잊어버리는 과정이, "자신의 사고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융통성 있게 넘나드는 삼투압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책을 읽을수록 주워듣는 건 많아지고 이론에 끼워맞추고 싶은 것도 많아지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 과정이 내가 배웠던 것들을 상대화하고 무력화하고 부분적 진실로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이 없고 때로는 내가 소중히 여겼던 신념조차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고 가볍고 날랜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게 내가 요즘 생각하는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