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육아 콘텐츠의 범람과 아들맘 비하의 간극 사이에서
* 교육 계간지 <민들레> 2024년 겨울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아들맘 vs 딸맘’이라는 논쟁 구도
“저희 애가 아들이라…”
아들이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하거나 위험한 장난을 치거나 친구에게 해를 입힐 때, 혹은 그런 행동을 사후적으로 해석할 때 아들 엄마들이 하는 말이다. 이 말에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민망함, 상대의 이해를 구하는 마음,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존재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 얽혀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초등 아들 엄마는 맨날 죄인’이라는 글을 보았다. 남아가 여아에 비해 말이 느리고 빠릿빠릿하지 못해 교실에서 억울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에는 수많은 아들 엄마의 댓글이 달렸다. “이래서 아들을 남녀공학 중학교에 보내기 싫다”는 남녀공학 반대파부터 “나는 여자아이들과는 대화도 나누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남녀칠세부동석파, “남자아이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딸 엄마가 문제”라는 딸 엄마 비판과, “남자아이들만 혼내는 선생님이 문제”라는 교사 비판에 이르기까지….
과거 맘카페의 단골 논쟁은 ‘워킹맘 vs 전업맘’이었다. 워킹맘은 전업맘이 경제적 자립이나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다며 무시하고, 전업맘은 워킹맘이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이제 워킹맘 vs 전업맘의 구도는 과거에 비해 헐겁다. 워킹맘이든 전업맘이든 자기계발의 명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프리랜서맘, 파트타임맘, 인플루언서맘 등 워킹맘과 전업맘 사이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된 요즘, 엄마를 둘러싼 단골 논쟁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바로 ‘아들맘 vs 딸맘’이다.
딸 엄마는 “통제가 안 되는 남자애들 때문에 내 딸이 피해를 입는다”고, 아들 엄마는 “여자애들의 약은 행동 때문에 내 아들이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고 억울해한다. 딸 엄마는 “아들 엄마가 아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고, 아들 엄마는 “딸 엄마가 딸을 공주처럼 보호하려고만 하는 게 문제”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논쟁은 201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와 백래시 등의 ‘대리전’ 양상을 띠지만 성별 차이는 본질적인가, 딸과 아들의 양육 방식은 달라야 하는가, 교실은 특정 성별에게 유리한 공간인가 등등의 중요한 논점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논점들에 대해 숙고하는 대신, 손쉬운 해답을 내어놓으며 승승장구하는 콘텐츠가 있다. 바로 유튜브 채널 <최민준의 아들TV> 같은 콘텐츠다.
남아와 여아는 다르다는 ‘아들 육아법’ 콘텐츠의 인기
83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최민준의 아들TV>는 남아교육 전문가를 자처하는 최민준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다. 최민준은 남아 대상 미술학원과 주식회사 아들연구소를 운영하며 아들육아법에 대한 책을 내고 강의를 한다. 아들을 대상으로 한 학습지, 달력, 굿즈 등을 판매하기도 한다. 최민준은 “여자인 엄마가 남자인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와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아들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아는 여아와 어떻게 다르게 설계되어 있으며, 어떻게 다르게 키워야 한다는 걸까? 그의 책 『최민준의 아들코칭백과』는 아이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아들을 키울 때는 적절한 수용과 단호함으로 아이를 바로잡는 ‘행동육아’가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지나친 공감육아의 그늘이 공론화되고 있는 요즘, 적절한 수용과 단호함은 남아와 여아 모두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최민준의 아들TV>뿐 아니라 아들 육아법을 설파하는 콘텐츠들은 남녀에 국한되지 않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아들 육아’로 한정함으로써 아들 양육에 어려움을 느끼는 엄마들의 불안을 겨냥한다. 최민준의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것 역시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게 맞을까’, ‘우리 애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아들 엄마의 고민과 불안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 육아를 표방하는 콘텐츠들이 남성과 여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딸의 육아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낸시 초도로우는 그와는 반대되는 이론을 펼친다.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어머니는 딸에 비해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이러한 양육 방식을 통해 남아는 좀 더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게 되지만, 독립성을 성취하는 대가로 여아에 비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감정적 능력을 억압하는 경향이 생긴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초도로우를 인용하며 친밀성의 영역에서 낙오된 남성이 친밀성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친밀성, 즉 평등한 맥락 속에서 타자 그리고 자신과 감정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견인하는 중요한 힘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초도로우와 기든스의 논의를 종합하면, 사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남성 또한 ‘여성적’이라 일컬어졌던 친밀성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데, 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에 따른 육아 방식 차이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아들교육 콘텐츠들은 “딸로 태어난 엄마는 죽어도 모르는 아들에 대한, 아들을 위한 아들 전용 교육 노하우”(아들연구소 스토어 카피)를 알려주겠다며, 은연중에 공감이나 소통능력의 부족, 목표 지향성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가르친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본질화할 뿐 아니라, 남성의 친밀성 능력 계발을 더욱 요원한 일로 만든다.
아들맘은 남미새의 진화 버전?
아들 엄마를 위로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한편으로, 아들 엄마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로 여자를 지칭함)가 ‘남미새-기혼녀-아들맘’으로 진화한다며 아들맘을 조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한 청년 여성들은 남성과의 연애나 결혼이 필수가 아니며 오히려 문제적이라고 보았고, 섹스‧연애‧결혼‧출산을 거부하는 4B(非)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남성과 결혼해 남성을 낳아 기르는 아들맘은 남성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 속에 있기에, 아들맘을 여성 연대의 변절자로 비난함으로써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여성 각각의 상황과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며 손쉽게 타인을 낙인찍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들이 '남미새'라는 명쾌한 단어로 가부장제의 본질을 간파한 것에 감탄했다. 남성 입장에서 생각하기, 남성을 불쌍히 여기며 '우쭈쭈'해주기, 남성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기 등은 가부장제가 배당한 여성의 성역할이며, 나의 결혼 생활 역시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깨닫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아들맘’이 성폭력, 사회진출 등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에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을 옹호하고 ‘남성 역차별’에 분노하는 등 아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비판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딸을 둔 남성 국회의원이나 판사가 양성평등에 기여하는 입법 활동이나 판결을 하는 경향이 많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듯, 자녀의 성별이 양육자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딸 엄마인 나는 ‘남미새-기혼녀-아들맘’을 바라보는 시선에 뜨끔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나 역시 내 아이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나의 한계와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가정 바깥에 높은 울타리를 두르고 내 아이를 배타적으로 보살피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른 집 아이들도 예쁘지만 내 새끼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내 새끼에게 상처와 아픔이 없기를 바라고, 팔이 자꾸 안으로 굽는… 이런 나를 마주할 때면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지는 건 아닐까 두렵다. 양육의 우선적 책임을 가진 이가 빠질 수 있는 이 그늘에서는 아들 엄마든 딸 엄마든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딸을 키운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젠더적 관점을 습득하는 건 아니다. 여성 인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딸을 양육하며, 이를 넌지시 자랑하기도 한다. 딸에게 자상하고 부드러운 아빠를 뜻하는 ‘딸바보’가 그런 경우다. 딸바보는 아들맘과 달리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통용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아빠가 딸에게 ‘깜빡 죽는’ 이유는 딸을 무한경쟁 사회에서 애교와 미소로 자신을 위로하는 무해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딸을 무해한 존재로만 가두는 이 시선은 성별화된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 더욱이 무분별한 애정을 주며 예뻐하기만 하는 것을 바람직한 양육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딸바보식의 양육 태도는 여성이 시혜적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하게 만들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아들 육아 콘텐츠의 범람과 아들맘 비하의 간극 사이에서
아들 육아법이 인기를 끄는 한편으로 아들맘이 비판의 대상,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으로 부상하는 세계. 이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기 위해 아들을 친밀성의 능력이 있는 남성, 스스로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남성,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음을 성찰하는 남성으로 키우려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이 내 주위에 많다. 나는 이러한 아들 엄마가 많아지기를, 그리고 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기보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딸 엄마 역시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임무는 또다시 여성에게 주어진 것일까? (기든스는 남성을 친밀성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친밀성 전문가인 여성이 나서줄 것을 기대한다. 안 그래도 바쁜데 여성이 짊어진 사명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기든스 선생님?)
다시 낸시 초도로우로 돌아가보자. 초도로우는 산업 자본주의가 정착된 후 가정이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여성 혼자 핵가족 내에서 자녀를 기르게 된 사회 체계 속에서 젠더 이데올로기가 생산되었음을 지적한다. 초도로우의 지적은 왜 어머니가 자녀 양육을 전담하는 자여야 하는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함축한다. 초도로우의 문제의식을 내 식으로 옮기면 이렇다. 엄마로서 아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아들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아들맘이 문제라고?
해결책은 간단하다. 남성이 육아에 참여하면 된다. 남성도 아이를 키우며 나와 다른 생명체에 좌절하고, 작은 생명체에게 내가 미치는 영향력에 두려움을 느끼며, 내 아이의 유익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분열할 때, 그래서 여성의 주양육자 위치가 지금보다 흐릿해질 때, 엄마를 위한 아들 육아 콘텐츠의 범람도 아들맘 비하도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