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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Mar 04. 2022

여행의 시작

유럽여행 10일째,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뮤제크 성벽에서 산책을 마치고 베른행 왕복 기차표를 끊었다. 매표소 직원은 스위스에 오래 있을 거라면 스위스 패스를 끊는 게 저렴하고 좋아! 하고 권유했지만 오늘이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날이에요, 내일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요 하고 사양하였다. 무려 여섯밤을 여기서 보냈는데 패스 끊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아까워하지 않고 80 몇 프랑을 주고 왕복 티켓을 샀다. 지난 유럽여행에서 단 1유로가 아까워 굶고 아끼고 아쉬워하며 흘려보낸 일정들을 반성하는 의미로 이번만큼은 몇 푼에 연연하지 않기로 해보았다.(사실 몇 푼이라기엔 스위스는 숙박 교통 등 물가가 천정부지인 것이 사실이다.)



무소의 뿔처럼

스위스에 도착한 내내 날씨가 흐렸다. 기대했던 융프라우는 온통 잿빛이었고 리기산도 안개가 자욱했다. 날씨가 개이길 기대하며 마지막 날까지 하이킹에 도전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루체른에서 1시간 거리인 베른을 스위스 마지막 여행지로 결정했다. 이곳이 스위스의 수도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날 밤 친한 언니와 우연히 합류하여 밤새 인생에 대해(자세히는 돈과 결혼과 사랑에 대해) 뫼비우스의 띠를 도느라 미처 오늘 일정을 검색해보지 못했다. 이 지역 랜드마크조차 모르고 있었다. 관광안내소에 가서 시티맵을 요청하고는 어디가 유명한지 물으니 영어가 유창한 아가씨가 장미정원부터 시작해서 기차역으로 쭉 내려오며 구시가지를 둘러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길치인 데다가 스물몇 해를 살아오는 동안 남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것을 매우 편안해하던 사람인데 지도 한 장을 쥐고 낯선 도시에 떨어지니 약간 긴장이 되었다.


곰의 도시, 베른

친절한 아가씨의 설명대로 역 앞에서 10번 트램을 타고 rosengarten에 내렸다. 지대가 높아 베른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푸른 강을 끼고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풍경이 고즈넉넉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저냥 평범한 것 같다. 나는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타입이라 겨우 열흘남짓 머무른 유럽이 이제 거기서 거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한 달의 일정에 다소 막막함을 느끼며 곰을 찾으러 떠났다. 베른의 상징이 곰이라고 한다. 주기에도 검은 곰이 그려져 있다.



아! 정말 곰들이 있구나! 대여섯 마리의 곰들이 당근을 주워 먹고 다니는걸 하염없이 바라보았는데 썩 재미가 있었다. 어쩐지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러게, 이게 뭐라고...


올드타운으로 들어서 걷다 보니 사람들이 시계탑 앞에 카메라를 치켜들고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막 도착하자마자 시계옆에서 조그마한 목각인형들이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며 몇 초간 허무한 세레머니를 마쳤다. 이게 다인가 싶었는데 사람들이 박수를 한소끔 치고는 해산하는걸 보니 그게 다였다. 어쨌든 기다리지 않고 바로 보게 되어 운이 좋았다.

구시가지를 거닐다가 아인슈타인의 생가라는 곳을 발견했다. 입장료는 6프랑. 티켓을 끊고 들어갔더니 견학 나온 스위스 중학생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2층에는 아인슈타인의 업적이 세련된 판넬로 전시되어있었는데 온통 독어와 영어라서 열심히 읽는 척만 하다가 나왔다. 1층에는 사랑스러운 응접실이 꾸며져 있었는데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따뜻한 느낌이 좋아 한참을 앉아있다가 지나가는 중국인 부부에게 부탁해서 사진도 찍고 나왔다. 책을 보는척 할테니 그모습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평소같으면 남사스러워서 못할 짓이라고 엄두도 안냈을 것이다.


기차역으로 돌아오기 전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고 가려는데 쉴새없이 마이크를 들고 멘트를 하는 사회자와 무언가에 들뜬듯한 사람들이 잔뜩 길을 막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좋은 냄새가 나는 할머니에게 뭐 기다리는 중인가요? 행사가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알프스에서 온 소를 끌고 여기를 지나갈 거라며 5분만 있으면 행사가 시작된다며 기다리란다. 소가 알프스에서부터 걸어왔다는건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5분을 지나 10분정도 기다리니 전통의상을 입은 잘생긴 청년들과 곱게 꽃장식을 한 소들이 위풍당당 길거리를 행진해 의사당 앞 울타리에 가두어졌다. 그런데 이것들이 걸음을 멈추지 마자 기다렸다는듯이 일사불란하게 똥을 싸기 시작해서 거리는 난데없이 소똥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야유하며 소들에게서 멀어져갔고 나도 중앙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Gruezi, Luzern!

베른을 넉넉히 둘러보고 기차를 타고 루체른에 돌아오니 4시였다. 한시간짜리 기차에서 옆자리 남자에게 미안하게도 자꾸 머리를 박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숙소에 도착하자 피곤이 몰려왔지만 한편으론 흐뭇한 하루였다. 나는 종종 진짜 어른이 못된것같은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혼자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길을 찾아 헤매이지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 퍽 뿌듯했다. 여행이 나에게 주는 기쁨 가운데는 이런 성취감이 분명 크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삶 속에서 성취감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 이 머나먼 나라에 와서 나를 바로잡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루체른에서 3박 머물렀던 이 숙소는 아마 이번여행 최고의 호사가 될 듯 싶다. 나는 어째서인지 하필이면 물가도 제일 비싼 이곳에서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있는 아파트먼트를 빌렸다. 셰르파처럼 가족들을 이끌고 융프라우를 다니느라 몸이 피곤하다는 것이 핑계였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루체른에 3박씩이나 하지는 않을것이다. 수도인 베른도 겨우 몇시간을 돌아다니면 관광이 끝나는 정도인데   역시 넉넉잡아 2시간이면 도시의 랜드마크를    있다. 그럼에도, 눈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gruezi! 하고 인사를 건내는 이곳은 정말이지 정감이 넘친다. 그리고 내가 지나왔던 도시중에 가장 살아보고 싶은, 살아봄직한 곳이었다.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자 앞으로 살아보고 싶은 곳을 다섯 군데 정도는 찾을  있을거라며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주었다. 내일부터는 진정한 백팩커답게 벙커침대에 아슬아슬하게 짐을 펼쳐놓고 귀마개를   불편한 잠을 청해야겠지. 오늘 마지막 밤은 빨래를 마치고 짐을 꾸린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채 와인을 마셔야겠다. 그런 호사도 없이 어떻게  긴긴 여행을  것이며, 그런 여유도 없이 긴긴 인생을   있겠느냐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 여행 내내 글을 쓰겠다는 다짐은 공교롭게도 이 글 하나로 끝나버렸다. 브런치에 썼던 첫 글이기도 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기. 금주는 글을 쓸 여유가 나지 않아서 묵혀 두었던 세이브 원고를 방출합니다. 다음주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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