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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여곡쩔 Apr 09. 2024

소개팅은 커피맛집 아웃백에서

도시남녀괴담 - 2


나는 비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고 아이의 탄생을 통한 가족구성원의 성장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내가 30대 한창나이에 접어들 무렵 부터는 자연스레 나의 연애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궁극의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주변 친구들도 그때쯤 결혼을 염두에 두고 까다로운 잣대를 연애에 들이대느라 다사다난한 부침을 겪었다. 소개팅을 할 괜찮은 여자는 많은데 괜찮은 남자는 없다는 정설이 우리 사이에 넓게 퍼졌고, 너도 나도 연애 시장의 싱글 남녀 성비 불균형 문제를 읍소했다.  


그때쯤 나는 소개팅을 꽤 자주 했는데 소개팅의 과정은 대부분 지난했다. 내가 괜찮다 싶으면 상대는 마음에 안 들어하는 눈치고, 내가 별로다 싶으면 상대는 괜찮아하는 일방적인 짝대기의 연속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지친 느낌을 풀풀 풍기며 만나 서로 '거 괜히 힘 빼지 맙시다'의 눈빛을 주고받은 뒤 건조하게 헤어지는 매크로의 반복이었다.


결혼하고 한참이 흐른 지금에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소개팅이 있다. 물론 잘 되어서 결혼까지 골인한 남편과의 소개팅이 가장 기억에 남을 테고, 그 외에도 소개팅으로는 드물게 서로 스파크가 튀어 만나다가 결국 툭하면 싸우고 헤어진 관계, 서로 호감을 가졌지만 끝내 현실적인 벽을 넘지 못하고 썸에서 끝난 관계 등 다양한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그 근처까지도 가지 못하고 하나의 단편적인 기억으로 남은 것들도 있다.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오직 하나의 대사와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되는 그것.





아이스커피잔에 송골송골 맺혔던 물방울이 뇌리에 남은 걸로 보니 그날은 날이 더웠던 여름 늦은 오후였을거다. 소개팅남은 명동에서 보자고 했다. 명동은 그때도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인들보다 더 자주 많이 보이던 곳으로 소개팅 장소 혹은 연인들의 데이트 플레이스로는 비주류였다. 의외의 초이스였다.


그 남자는 아웃백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웃백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인식이 강해 소개팅으로는 처음 가보는 장소였다. 시간도 주말 애매한 오후 4시쯤이었는데 이른 저녁식사 혹은 늦은 점심을 먹는 건가? 여기서 부시맨 브레드를 먹게 되려나? 아니면 오지치즈프라이? 여러 가지를 아리송하게 추측하며 아웃백으로 향했다. 그와 처음 어색하게 인사 후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얼굴도 이름도 직업도 대화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말 한마디만 나의 기억 장기 저장소에 두고두고 남았다.


"저는 아웃백 커피가 맛있더라고요."


나는 평소 커피 애호가가 아니어서 아웃백 커피 원두의 맛과 향이 어떤지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의 말에 동조 혹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커피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 원두에 대한 취향, 맛있는 카페 추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허공을 맴도는 대화 가운데 아웃백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롯데리아나 맥도널드에서 콜라를 스스로 따라 마실 때 쓰는 것과 같은 우둘투둘한 질감의 플라스틱에 담겨있었으며, 그 컵은 패밀리 레스토랑 혹은 햄버거집의 플라스틱 컵들이 으레 그렇듯 이곳저곳에 기스가 잔뜩 나있다는 사실만 캐치했을 뿐.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웃백이 커피맛집이라 말하는 그 남자의 커피 취향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먹을 수 있는 건 딱 이만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남자에게는 소개팅이라는 인고의 과정이 주사위를 반복해서 던지는 확률게임이었을 거다. 분자에 소개팅 부담 비용을 올리고 분모에 맘에 드는 여자와 마음이 통하는 빈도를 넣어 소개팅 효율성을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효율 증대를 위해서는 정성도 돈도 적게 들어갈 친숙한 장소 선정이 필요했을테지. 확률게임의 특성상 여러 번 반복해서 던지다 보면 아이스커피가 아닌 립아이 혹은 스테이크를 사주고 싶은 여자가 나타날 거란 믿음도 충만했겠지.


나는 그날 아이스커피의 레벨테스트를 끝내 넘지 못했다. 그리고 명동의 아웃백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아직 그대로 있다.


그 남자는 그곳에서 몇 번의 소개팅을 더 하고 자신의 짝을 만났으려나. 부디, 아웃백 귀신으로 명동 일대를 떠돌고 있지 않길 바란다.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서로의 괴담으로 남아버린 남녀, 그 사이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도시남녀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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