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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일 (수) 오전 11:23
보낸 사람 : MBC 드라마 극본공모
제목 : MBC 2024 극본공모 최종심 대상작 안내
'날 좀 제발 눌러주세요'라고 제목으로 갖은 재롱을 부리는 스팸들만 무수하던 메일함에, 전혀 다른 무게감의 메일 한 통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미니시리즈 부문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안내 메일이었다. 이럴 수가. 정말 조금도 예상도 못했다. 처음 써본 미니시리즈 대본이자, 내 세 번째 대본이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되다니? 남편은 '장항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냐며 설레발을 쳤다.
감격스러운 순간도 잠시, 그 뒤로 나에게 밀려오던 것은 강한 냄새였다. 바로 똥줄 타는 냄새. 그 메일을 받은 날짜로부터 정확히 20일 뒤까지 3,4부 대본을 완성해서 내야 했다. 물론 공모전 공고 당시 최종심 대상작에 오르면 3,4부를 제출해야 한다는 고지가 있긴 했다.하지만 나는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1,2부를 낸 뒤에 3,4부의 단 한 글자도 쓸 생각을 안 했었다.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날로부터 12일 뒤가 나의 두 번째 회사로의 첫 출근날이라는 점. 대학 이후 17년간 줄곧 다녔던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둔 뒤의 휴식기 동안 5개 회사와 총 17번의 면접을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감과 초조함이 찾아오기도 하고, 나한테 없는 건 이직 역량인가 싶은 생각에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고민과 생각을 치열하게 기록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 브런치도 시작했고, 드라마 작가 아카데미반도 등록했었다.
좋게 표현해서 '작가지망생'이고 사실상 '백수'이던 시기가 길어진다 싶을 때쯤, 내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뜬금없는 업종에 위치한 지금 회사의 포지션을 헤드헌터로 제안받았고, 그냥 한 번 써본 곳에서 면접을 단 한 번만 보고 최종 합격을 했다. 그간 몇몇 글로벌 기업에서 4~5차례의 면접과정에 지쳐있던 나에게 이 초스피드의 과정은 참으로 생경할 뿐이었다. 심지어 일찍 출근하라는 회사의 닦달에 나는 면접을 보고 3주 만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짚신도 제짝이 있고, 사람에겐 어떤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게 있다 싶다.
근데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주목해야할 것은, 첫 출근일로부터 8일 차가 3,4부 대본 제출 마감 이라는 사실. 어머나 세상에!
새 회사에 출근을 하면 나에게 대본을 쓸 시간은 커녕 그에 대해 생각할 여력과 정신이 없을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러므로, 나는 첫 출근 전에 어떻게든 대본을 완성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리미리 좀 하지 이 등신아'라고 스스로에게 욕을 한바가지 퍼부으며 벼락치기하던 학창 시절모드로 돌아가 밤낮없이 3,4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아침에 등원시키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한바탕 쓰고, 아이 하원시간 맞춰 잠시 엄마 모드로 돌아섰다가 아이가 잠드면 작가 스위치를 켜고 새벽까지 달렸다. 회사 다닐 때 워낙 빡세게 일해서 밤낮으로 일만 하는 것은 익숙하긴 했다만, 물리적으로 완성해 내야 하는 '35페이지 내외 2부'의 분량이 있고 또 아무렇게나 써 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시간 자체가 모자라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19일간의'졸속집필'이 끝나고 몇 번의 퇴고 끝에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싶었던 회사 첫 출근 전날 일요일 오후, 발송 버튼을 클릭했다. 똥줄은 다 타버린 지 오래, 남은 것은 퍼석퍼석해진 신체뿐인 순간이었다.
...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약 10개월간의 백수 시절을 끝내고 직장인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최종심에서는 결국 떨어졌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수상의 영예는 더 공 들이고 더 오래 고민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 사실 최종심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최종 당선이 되어서 드라마 집필과 회사 일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메타 인지'가 안 되는 허무맹랑한 도전이 아니고 어느 정도 자질이 있다고 권위 있는 곳에서 평가해 준 것 같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그러던 어느날, 새 회사에 정신없이 적응을 해나가던 중, 다시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내 작품을 재미있게 보았다는 PD가 미팅을 제안한 것이다... 나 드라마 작가를 계속 꿈꿔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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