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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한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회사 업무를 부랴부랴 마치고 나와 급히 택시에 올랐다. 최종심에 제출한 대본은 떨어졌지만, 내 대본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PD가 제안한 미팅날이었다. 저녁 7시, 상암 MBC 2층 카페, 약속장소로 향하는 길에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어떤 사람이 나올까, 몇 명이 나올까, 무슨 얘기를 할까, 계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회사 그만두고 써야 한다면 어쩌지.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나.
카페에서 만난 PD와 인사를 나눴다. 명함을 내미는 PD에게 나에게도 새 회사의 명함이 생겼으니 조심스레 내밀었다.
"... 부장님이시네요?"
서로의 짧은 자기소개 후, PD는 내가 지금 회사에 이직을 한지 얼마 안 되었으며, 조직의 리더 포지션이자 동시에 워킹맘이라는 점에 실망한 내색이 역력했다. 더불어 내가 콘텐츠 업계에서 일을 오래 하다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과, 심지어 같은 회사 출신이라는 점,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소속으로 일했으며, 내가 시기상 선배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나니 같이 앉아 있는 곳의 공기가 한순간에 묘해졌다.
PD는 내 대본에 좋았던 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떤 점들이 아쉬워서 이런 방향으로 좀 더 개발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방향성은 사실상 새로운 이야기와 같았다. 내가 그 방향에 뜨뜻미지근해 보이자, 대화는 곧 동력을 잃었다. 이어 PD는 내가 웹툰 각색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오피스 코미디 장르에 강해 보이는데 그쪽으로 계속 정진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한마디로 망한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었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다시 만날 일이 없음을 예상하고 나누는 대화. 예의는 차리되 흥이 안나는 대화. 미래에 대한 언급은 빠진 대화. 그런 대화가 오가는 자리 말이다.
PD에게는 내가 작가라는 꿈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본인이 내미는 희망고문성 카드들을 믿고 정성을 다해 함께 해나갈 사람으로 안 보였을 것이다. 대본이 어느 정도 개발되고 편성을 받으면 집필에 그야말로 매진해야 하는데 나에게 그런 각이 안 나왔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꿈을 위해, 안정적인 월급쟁이 생활을 뒤로하고 최종적으로 작가지망생의 삶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내내 따라붙었다.
그 길을 모르는 척 가기엔 난 업계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대본이 완성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 수정에 수정을 거치고, 캐스팅이 붙고 투자가 확정되기까지, 촬영을 하고 편성날짜가 나와 첫 방송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야기는, 대본 그 자체가 아니라 왕창 간추려진 보고서로 탈바꿈되어 바쁜 의사결정권자들에 의해 속단받거나 평가절하되기 일쑤이며, 그 과정에서 무한 수정과 무한 대기의 사이클만 반복될 수 있다는 점. 그 점을 너무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 기간을 오직 전업작가지망생 포지션으로 버티기에 설령 계약금이라는 것이 있더라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설령 편성을 확정받고 작업을 한다 치더라도, 드라마라는 것이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산업이자 공동 창작의 산물이며 일정 시기가 지나면 회사일과 병행하기 어려울 것 역시 자명했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내가 벌어 들이는 돈의 합계는 지금보다 작을 수밖에 없음이 당연했다. 물론 내가 데뷔작 한방에 스타작가가 되어 몸값이 껑충 뛴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미팅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줄곧 했으므로, 나의 태도는 뭔가 방어적이었을 것이고, PD에게는 나에게 열정을 찾지 못 했으리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각자의 말에 진전이 없는 순간이 왔다. 우리는 자리에서 어색하게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PD는 내게 계속 글을 써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각색할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연락을 하겠다는 말이 예의상의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드라마 작가의 꿈을 계속 꾸기엔 무리가 있겠다고. 드라마라는 산업은 너무나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려있고, 결과를 모르는 꿈에 모든 것을 걸고 버티기엔, 내겐 할 일도, 책임져야 할 것도 많다고.
꿈꾸기를 좀더 일찍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마치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어 망한 소개팅 끝에 비혼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 같다.
글로 밥 벌어먹고사는 삶을 희망하며, 드라마 작가의 꿈을 본격적으로 꿔보았던 1년 남짓의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이것으로 드라마 작가의 꿈을 접습니다.
언젠가 다시 꾸게될지 모르지만, 일단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