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여곡쩔 Mar 26. 2024

나에게 없던 한 가지, 이직 역량

우여곡쩔 OO도전기 - 1


20대까지의 인생에서 사람들에게 보통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여겨지는 대학 입시 그리고 취업까지의 과정은 내게 비교적 순조로웠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최신 입시제도여서 정시 대비에서 생소했던 수시 전형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시 2학기 전형. 내신 성적과 학생기록부를 바탕으로 지원해서 붙고 이후 수능시험 후 최저등급기준을 통과하면 최종 합격하는 형식이었다. 서울 소재 모 학교에 지원을 했고 면접을 거쳐 1차 합격 했다. 면접 때는 운이 특별히 좋았다.


나는 경기도의 작은 도농복합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퀄리티 있는 교육 정보 습득의 기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는 고등학교 때 일종의 도시 유학을 가서 기숙사가 있는 명문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학업 최신 정보 습득에 있어 당연히 나에 비해 앞서 있었고 고맙고 친절하게도 나에게 자신이 듣고 있는 인터넷 강의사이트라며 들어보라고 '메가스터디' ID를 공유해 줬다. 메가스터디는 정말 신세계와 같았다. 특별히 손주은 선생님의 국사, 이범 선생님의 물리 수업을 듣고 성적이 많이 올랐다.


수시 지원 후 서류가 통과하자 면접의 기회를 가졌다. 면접 당일 대기실의 공기와 면접관들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면접관의 한 질문이 내 합격 당락을 좌우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메가스터디에서 2001년 사망하신 조진만 선생님의 논술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사회 이슈와 관련한 주제로 여성 취업 가산점이나 여성 직원 고용 비율 쿼터제 등에 관해 짤막하게 다뤄주신 적이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면접관은 정확하게 같은 주제의 질문을 던졌다. 여성 사회 진출과 가산점제도와 같은 여성 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순간 나는 메가스터디 인강의 한 장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땅에서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하면 토끼가 승리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북이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땅이라는 경쟁 환경이 토끼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거북이가 승리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는 현재 남성에게 여러모로 유리한 구조다. 여자가 공정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가 주요 요지였다. 내 전 순서로 메가스터디 동일한 강의를 듣고 온 지원자가 없었던 게 확실하다. 면접관들의 눈이 빛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수시에 합격했다.


수시를 합격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것은 수능등급 최저 기준을 통과하는 것. 당시 나는 2등급 이내로 받아야만 했다. 그때 나는 수시는 일종의 보험이고 정시를 더 잘 봐서 더 좋은 대학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보험이 생기는 순간 안일해진다. 결국 나는 2등급 안에 들기를 잠재의식 속 목표로 잡고 딱 그만큼만 공부해서 2등급을 받았다. 결국 수시합격시켜 준 대학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 되어 나는 그 학교의 신입생이 되었다.


그즈음 내 친구들은 가고 싶었던 학교에 떨어지기도 하고 예비합격을 초조해하며 기다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마음고생을 했지만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가장 심한 좌불안석의 순간이었다고 한다면 수능 시험을 봤는데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가채점을 했더니 수학 점수가 엄청 낮게 나왔던 것. 나는 그날 수능 2등급만 붙게 해 준다면 평생 착한 일을 하겠다며 기도하고 집에 오는 길에 길 가의 쓰레기를 5개 이상 주웠다. 하지만 곧 그 해의 수능이 역대급 어려운 불수능임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나의 고통은 이틀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할 때도 나는 꽤 순조로웠다. 그때도 일종의 수시합격과 같이 공채 인턴 합격이라는 보험을 졸업 하기 전에 들어둔 덕에 취업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다.


대학교 4학년 3월 어느 날, 한 대기업의 그룹 공채 조건의 인턴 채용 소식이 떴다. 그 해에 가장 이른 일정이었다.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일정을 머리에 저장해 두고 꼭 지원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사실 그 시절은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여서 특정 회사에 가고 싶든 안 가고 싶든 모두 지원서를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모든 친구들이 그 기업의 계열사 별 직무를 전략적으로 골라 준비했다.


그런데 나는 꼭 가고 싶다는 마음가짐과 모순된 게으른 행동으로 마감 날짜를 잊어버려 마감 당일까지도 지원서를 쓰지 못했다. 친구들이 놀라서 말했다. "야! 오늘이 마감이야!!" 눈앞이 샛노래졌다. 그때는 이미 마감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나에게는 이미 큰 행운이 찾아와 있었다.


많은 인원이 그룹 채용 홈페이지에 몰려 서버가 다운되었던 것. 회사는 마감 기한을 하루 정도 연장해 주었다. 나는  학교 컴퓨터실로 달려가 연장된 시간에 초스피드로 지원서를 써서 제출했고 나는 채용 전제 목적의 인턴으로 뽑혔다.


여름 방학 6주의 인턴 생활을 잘 마치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나는, 다른 친구들이 취업으로 연신 괴로워할 때 대학교를 일찍 붙었던 고3시절처럼 남은 4학년 2학기 생활을 걱정 없이 또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난 그 회사 말고 더 좋은 회사 갈 거야' 라며 당시 객관적으로 더 좋고 유망한 회사들을 두 군데 더 노려보았지만 역시 보험의 효과인지 한 곳은 시험 낙방, 한 곳은 면접에서 낙방하면서 결국 인턴 생활을 했던 회사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의 운과 팔자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서 오래 다닐 팔자였나보다. 미리미리 열심히 준비한 다른 친구들이 아니라 지원서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연장된 마감 시간 안에 급조한 지원서를 낸 내가 합격하다니.





첫 회사에서 나는 장장 17년간 일을 했다. 물론 회사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고 소속도 바뀌긴 했지만 같은 회장님 테두리 안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힘들 던 어느 날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결심의 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나의 신변 정리도 급속도로 이뤄졌다.

그간 회사에서 매년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고 비교적 괜찮은 평판을 쌓았다. 승진도 제때해서 임원을 제외한 일반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종 직급인 부장을 달았고 팀장도 해보았다. 여러 가지 역할을 했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사실 그만큼 일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으면 억울할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이 지겨울 만하면 산업과 업무를 바꿀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래서 그간 회사를 떠날 이유가 딱히 없었다. 17년의 직장생활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역량을 쌓아나갔다.


하지만 내가 기르지 못한, 0에 가까운 역량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이직 역량이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 다니면서 힘들 때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 이직하겠다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나는 열심히 정성껏 어딘 가에 이력서를 내서 면접을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퇴사 후 새로운 회사로 재취업을 준비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연애도 해본 놈이 하고 이직도 해본 놈이 한다고 나에겐 이직 역량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걱정하는 엄마에게 "어디든 가겠지"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재취업이 쉽지 않다. 예상 보다 백수로서의 기간이 길어진다. 때 마침 경기도 안 좋거니와 연차도 많다. 내 경력은 한 회사에서 관리자로 나아가는데 초점이 맞춰져 브로드하고, 내가 몸 담았던 산업은 특수하다. 나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이 되는 순간 실의에 빠지기 시작하고 자신감이 하락한다.


또한 워킹맘으로서는 지독히 고된 시기를 버티고 버티다가 일단 중지했던 터라, 그리고 아이의 성장과정을 밀착해서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났더니 직업관이 자연스레 변했다.


육아와 병행이 가능한 널널하거나 집과 가까운 회사 혹은 육아를 일정 부분 희생하고라도 주위의 도움을 적극 요청해서라도 너무 가고 싶은 회사만이 옵션으로 남았다. 이 둘만 손바닥에 놓고 따져보다 보니 결국 지원하고 싶은 곳 자체가 없다. 마치 이것저것 따지고 재고 머릿속에 시뮬레이션 돌려 섣부른 결론을 내느라 아무런 행동하지 않는,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모태솔로 혹은 까다로운 입맛으로 혼기를 놓친 사람과도 같다.


내 인생의 행운과 순탄함은 혹시 대학입학과 첫 취업에 다 몰렸던 것일까? 40대에 비로소 시작된 방황, 이 기간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나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습을 알 수 없는 미래에서 되돌아보기 좋도록, 때로는 의욕찼다가 때로는 무기력해졌다가를 반복하는 지금의 마음과 일상을 기록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음 글 내가 영어 공부를 중단한 이유 로 이어집니다.


최근까지는 저도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었습니다. 퇴사한 전 김부장의 인생 2막을 차례차례 기록합니다. <우여곡쩔 OO도전기>
매거진의 이전글 이것으로 노동의 역사 1막을 마무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