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빔이라고 했다. 엄마는 나주에 내려갈 일이 있을 때마다 식구들의 차림을 신경 썼다. 정작 본인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특히 설에는 거의 새 옷을 사 입혔고, 그걸 설빔이라고 했다. 우리가 헌 옷을 입고 간다던가, 너무 편한 차림으로 귀성하게 되면 엄마가 욕먹는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평소엔 입지 않는 가벼운 정장을 하고, 오빠와 나도 단정한 새 옷을 입었다.
우리는 차도 없고, 그때는 꼭두새벽에 기차역이나 터미널에 가서 매표해야 했던 대중교통,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셋째 큰아버지 차를 얻어 타고 나주까지 갔는데. 그때는 고속도로가 지금 같지 않아 꼬박 하루가 넘게 도로에 갇힌 적도 있었다. 나는 멀미를 잘했고, 우리 식구들은 장거리 운전대를 혼자 잡은 큰아버지 눈치를 봤다.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고 아버지는 면허를 땄다. 차를 사고, 고향을 오가는 길에 세 번 사고가 나 때마다 차를 바꿔야 했다. 아무튼, 시골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잔뜩 긴장한 채로 인사를 드리고 얼른 방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연신 게우면서 온 길이라 끼니를 거르고 보리차만 꼴딱꼴딱 받아 먹고 있으면, 방문 너머에서 할머니가 꾸중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기운 좋던 노인의 목소리가 좀 억세고 말투가 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린애가 무슨 멀미를 그렇게 하냐는 말은 나중에 어린애도 아닌데 아직 멀미를 그렇게 하느냐고 바뀌었다. 식혜라도 먹여라 뭐라도 먹여라, 그런 말이 뒤따랐던 거 같은데. 기억이 곱게 치장된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사촌 동생들은 늘 내복 차림이나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잠옷을 입고 올 때도 있었다. 엄마는 몰래 그걸 흉봤지만, 사실 할머니가 꾸중하신 적은 없었고 나는 그 애들의 편한 차림새가 부러웠다. 그 집은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의 형제들 중에 가장 넉넉하게 산다. 가장 좋은 차를 타고. 가끔 만나게 되는 모임에서 그 애들은 여전히 편한 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쓴 채로 꾸벅 인사만 하고 가고, 오빠와 나는 각자 준비하고 나왔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단정한 차림새로 불편한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엄마를 욕 먹여서는 안 되니까.
아무튼 설빔이라고 했다. 계산을 하면서 엄마는 항상 몇 개월이요, 하고 말했다. 평소에는 현금을 쓰셨기 때문에, 그냥 어른들은 모든 카드로 하는 계산을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 몇 개월에 나눠서. 몇 달에 걸쳐 내야 할 만큼 비싼 거라니. 새 옷은 할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설빔인가 싶다. 나도 오늘 조카 옷을 샀다. 사야 겠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설이니까 새 옷을 사줘야지라고만 생각했지, 엄마가 내게 했던 걸 그대로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니 좀 재미있다. 사실 29개월 꼬마는 늘 내복이나 편한 운동복 차림인데. 나는 단정한 외투와 원피스를 샀다. 그래 봤자 이 동네에 오는 차 안에서 조부모께 얼굴을 비추기까지 잠깐, 뭐 그 정도 말고는 입을 일도 없겠지만. 아무튼 단정한 옷을 샀다. 엄마가 분명 칭찬을 해줄 거다. 잘 키웠어, 너는 내가 참 잘 키웠어, 그러겠지.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고, 나는 이제 할머니가 없다. 조카는 멀미를 하고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는, 아기가 무슨 멀미를 하느냐고 같은 말을 매번 하고, 아이 멀미 했니? 늘 확인 하지만, 아무도 혼나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의 아들도 운전을 한다. 아버지의 아들도 아버지가 되었다. 우리는 가진 적 없던 할아버지를, 우리 조카는 가졌다.
그래도 역시, 아무도 혼나지 않는 명절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할머니가 없다니. 할머니가. 할머니가 이제 없다니. 우리가 세상에 나고 단 하루도 없던 적 없는 할머니가, 이제는 없는 명절이, 그게 가능한 일이라니. 이치에 맞게 다음으로 넘어간 게 아니고, 그냥 뒤죽박죽 섞인 거 같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나는 할머니가 없고 조카는 할아버지가 있고 그 할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고… 나는 아직 슬픈가. 그럼 아직 할머니는 여기 있나. 아무튼 설빔을 샀다.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 할머니가 보시기에, 좋을지도 모르지. 막둥이네 딸이 야물게 잘 컸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계산 어떻게 해드릴까요, 묻길래. 그냥 해주세요, 했다. 몇 개월이요, 하지 않고. 움직이는 토끼 인형 세트도 하나 샀다. 사실 좀 나눠서 내는 편이 연말연초 지갑 사정에 맞겠지만 괜한 치기였다. 다음 달의 나에게 좀 꿔야지 어쩌겠나. 좀 아껴서 살지 뭐. 아. 역시 엄마를 닮기는 글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