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대한 부채감을 내내 떨치지 못하고 지내던 중,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범죄 액션 느와르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꽤 흥행이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기도 하고. 어느 금요일, 퇴근해서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다가 별안간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 왜
갑자기 성사된 만남.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곤욕이지만, 생각해 보니 둘이서 보는 영화가 처음은 아니긴 하다. 많은 건 아니고 이번이 딱 두 번째. 나의 10대에는 아버지의 고성이, 나의 20대에는 나의 고성이 오갔던 우리 부녀에게 이 두 번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다. 영화관까지 가는 길에 대화를 멈추지 않으려고 부단히 용을 썼다.
주먹질하고 피 튀기는 영화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남자의 로망 같은 것이 있는 건지 즐겨 보곤 한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가 이 영화의 전편이 어땠는지, 그것과 이것은 어떻게 다른지 간단한 감상까지 남겼다. 어차피 기다리면 테레비에서 다 할 텐데 뭘, 미운 소릴 덧붙이긴 했지만. 분명 언젠가 특선 영화니 뭐니 TV에서 보게 되면, 우린 그때 영화관에서 크게 봤지! 하고 으쓱할 모습을 안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보는 모든 영화는 이런 식이다.’고만 기억했지. ‘아버지는 영화 채널을 자주 틀어두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나? 그런 것 같기도. 명절이면 채널마다 특선 영화가 몇시에 어디에서 하는지를 외우고 있다.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그 시간이 되면 가족들의 동의 없이 채널을 돌린다. 당연히 그게 싫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그러니까 싸워대고 두서없이 험한 말만 난무하는 ‘야만적인’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영화가 아닌 건 아닌데. 나는 나의 기준으로 그저 폭력적인 영상을 좋아하는 야만적인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 물론 어린아이가 그렇게 자극적인 화면과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연기라고 할지라도), 총소리, 맞는 소리, 부러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같은 것들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뭐
아무튼
나는 아버지의 취향을 인정하기로 한다. 나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의 순기능이다. 한때, 동네 분위기를 흐리는 무리와 어울려 다녔다는 아버지의 젊음이 나는 부끄럽고 무서웠다. 사춘기 때 아버지와 내가 자주 부딪히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는 말했다. “아빠가 너무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 너 정말 맞을지도 몰라. 아빠 젊어서 그런 사람이었어.” 그 말을 아마 엄마는 잊었겠지. 내게 깊게 박힌 엄마의 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래서 더 인정하기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그런 과거를 가진 남자의, 아내를 겁에 질리게 하는 남자의, ‘그런’ 영화 취향을.
이제야 인정한다. 존중한다. 내가 아버지를 선택한 적이 없듯이, 아버지도 이런 나를 선택한 적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이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언젠가의 헤어짐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되어 있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가 단지 아버지로, 딸이 단지 딸로 남을 수 있기 위해서. 부지런히.
-아빠, 정말 저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있을까?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