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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윤 Jan 04. 2024

Reason 2. 전 후추 안 좋아해요.

안다는 것에 대하여

저는 후추 안 좋아하는데요


900개가 훌쩍 넘는 후추에 대한 사랑고백이 난무하는 코멘트 속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기뻤다.

분위기가 전복될 그 순간을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페퍼는 종종 후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아니 생각보다 더 자주 만난다.


마르쉐에서, 오프라인 팝업에서도 후추를 왜 좋아하는지 자주 묻는데 ‘후추’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불호라며 도망가는 그룹이 있는 반면,

색색의 작고 둥근 알맹이들이 차(tea)나 다른 향신료가 아니라 ‘후추’라는 것을 듣자마자 달려드는 그룹이 있다.


후자의 그룹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느낀다.

신선해!

반면 전자의 그룹은 또 둘로 나뉜다.

바로 도망가는 그룹과 그래도 귀를 기울여보는 그룹. 한 번쯤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사랑스러운 핑크페퍼부터 소개한다(고 쓰지만 실제는 반강제 테이스팅이다).


자, 이제 핑크페퍼 테이스팅의 막의 구성을 살펴보자.


<기 : 도입부>

후추 좋아하세요?

아니요. 별로.

음 그럼 이 귀여운 핑크페퍼 한번 드셔보실래요?


오페퍼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당황한다.


후추를요? 그냥요?

네. 핑크색이라 맵지 않아요.(색과 맛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단순히 이 문장만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결론만 말한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풀 수 있길.)

그래도 페퍼라면서요.

이름만 페퍼예요.(이 문장 바로 뒤엔 후추가 매울 리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야만 한다.)


이 혼란을 주는 것이 시식을 권하는 자의 밑밥이다.

도입부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후추라는 관념적인 언어에 메여있는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페퍼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사용한다.


<승: 전개와 클라이막스>

이제 본격 승의 타임이다.

핑크페퍼를 한알씩 전달하고 테이스팅을 한다.


혀에 닿자마자 설탕처럼 달콤할 거예요. 씹다 보면 은은하게 꽃향기가 퍼질 거고요. 이제 아주 미세하게 민트같이 화한 맛이 여운으로 남을 거예요.


내가 읊는 문장에 따라 맛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눈이 점점 커진다.


<전 : 전환>

자, 오페퍼의 말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보려는 사람들은 이제 핑크페퍼 한알로부터 시작해 오페퍼의 후추들을 모두 경험할 마음이 되었다.


단지 이름과 맛을 보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후추들을 모두 시향 하게 된다. 후추의 세계로 안내하는 속성 후추워크숍인 셈이다.


이건 뭐예요? 저건요?
와 이건 그냥 향신료인데요.
애니멀틱한 향이 나요.
대추 같아요.


이쯤 되면 사람들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감각들을 열어 한껏 경험한 소감을 쉴 새 없이 전한다. 몇 분 간 후추들을 코로, 눈으로, 입으로 직접 경험하다 보면 결국엔 고백하고야 만다.


<결 : 마무리>

나 후추 좋아하나 봐요.

예쓰.


후추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이 오페퍼를 경험하고 나면 왜 후추를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하는 것일까.

나는 감히 후추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안다는 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플라톤도 말했지만, 존 버거의 말을 옮겨본다.



“본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주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운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언어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매일 저녁 우리는 해가 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과 설명이 우리가 본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핑크페퍼는 식물학적으로는 후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추라고 불린다. 보이는 대로 관습적으로 명명한 결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핑크색의 둥근 열매가 핑크페퍼라고 불린다는 것을 안다. 후추와 비슷한 크기의 둥근 열매이니까 핑크 뒤에 ’페퍼‘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사실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실제로 맛을 보고 난 이후에도 후추 맛이

난다, 맵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실제로 내 감각에 집중해서 경험하고 나면 핑크페퍼가 식물학적으로는 왜 후추가 아닌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핑크페퍼는 우리에게 친숙한 통후추인 piper nigrum이라는 품종과는 식감과 향이 후추와는 정말 구별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맵다고 표현한 것도 후추나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아닌 민트나 타임과 같은 허브에서 경험한 화-한 맛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에서 오는 첫 번째 반전,

그리고 맛에서 오는 두 번째 반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페퍼의 후추들을 모두 감각한 후 말한다.


이게 후추라면 저, 후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는 이런 순간을 만날 때마다 후반 1분을 남기고 들어간 슛으로 승리하는 축구팀이 느끼는 것과 유사한 희열을 느낀다.


사람들은 반전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환호한다. 우리가 손흥민도 아니고 토트넘 직관을 경기마다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 순간의 참여자가 된다면? 당연히 아주 영광이다.


한 개인이 경험이 전복되는 순간에 직접 참여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귀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핑크페퍼로 시작해 오페퍼의 후추들을 경험하고야만 사람들은 이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경험은

비가역적이니까.


그간 오페퍼가 제안하는 모험에 기꺼이 동참해주신 분들은 그야말로 모험가들이다. 모험은 반드시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떠나야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존에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것을 경험해보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모험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후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용기있는 분들과의 이 모험이 꽤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는 오페퍼 홈페이지에 있는 소개들의

몇 문단을 옮긴다.


어떤 것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 세계와 옛 세계의 경계에 서서 선택할 뿐입니다. 다시 다른 돌멩이가 떨어지면 그것을 느끼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듯 경험은 비가역적으로 삶을 나아가게 해 주고,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들은 어쩌면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경험들의 총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돌멩이가 떨어지길 기다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능동적으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모험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적당량의 용기가 필요하고 내가 몰랐던 세계를 적극적으로 만나려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작은 후추 한알도 이러한 모험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Ö PEPPER는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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