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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를 빛내 Mar 11. 2019

세계 최대 아트페어에서 미술계의 흐름을 읽다.

33 개국, 198개의 갤러리가 참여한 뉴욕 Armory Show 방문기

매년 3월 초는 미술을 사랑하는 뉴요커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간이다. 예술과 자본주의가 만나는 곳, 세계 최대 아트페어 Armory Show를 포함해 다양한 아트 페어가 곳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아트페어는 크게 두 가지 역할로 나뉜다.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디자이너들에게 트렌드를 읽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교육의 장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보다는 덜 교육적이고 불친절하지만), 그리고 미술품을 사고파는 바이어들과 갤러리/아티스트를 연결시켜주는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한다. 많은 갤러리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경쟁적으로 참여해 작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그 열기는 더욱더 뜨겁다.


모처럼 구름 없는 맑은 날씨의 토요일 낮, 미드타운의 동쪽에서 57번 버스를 타고 맨해튼 시내를 가로질러 뉴저지가 보이는 강가에 내려서 아모리 쇼에 도착했다. 이른 낮에는 비교적 한산했지만 오후가 되면서 인파가 몰려 꽤나 북적였다. 숨 막히는 인파 틈에서 수 백, 수 천 개의 작품들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그 작품의 뒷 이야기를 큐레이터들에게 전해 들으며 얻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 기억이 채 가시기 전에, 오늘은 아모리쇼의 역사와 키워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들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아모리쇼의 역사

지난 3월 7일 목요일에 개장해 10일 일요일까지 열리는 세계 최대 아트페어 Armory Show 아모리쇼는 약 1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아트 페어이다. 1913년 25가와 렉싱턴 애비뉴 사이에 있는 무기 저장고 Armory에서 처음 열려 그 이름을 유지한 채 1994년 Gramercy Park 호텔로, 2001년 도시 서쪽에 위치한 Pier 90, 92 항구에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과 갤러리들이 참가하여 작품들을 선보였다.



Armory Show 2019, 무산될 뻔하다? 

2019년 Armory Show는 개장하기 2주 전 큰 위기에 봉착했다. 예정대로 작품들이 전시될 Pier 92 항구가 뉴욕 시 당국으로부터 수 만 명의 관람객과 작품들을 수용하기에 구조적으로 부적격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부랴부랴 주최 측이 옆에 위치한 Pier 90 항구를 선점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항구에서 매년 동시간대에 열리는 Volta Art Fair가 취소, 참가했던 다른 예술가들과 작품들은 뉴욕의 수많은 갤러리들로 뿔뿔이 흩어져 전시를 해야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Plan B라는 아트 페어로 재개장했으니 기회가 된다면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2019 Armory Show는 Pier 90, 92, 94 이 세 곳에서 열리게 되었고, 33개국에서 온 198개의 갤러리가 참가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게 되었다.



Armory Show 2019의 키워드


블랙 파워 (Black Power)

2018년과 2019년 초는 흑인 아티스트들이 급부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Black Power의 해였다. 비욘세와 제이지 커플이 루브르 박물관을 무대로 촬영한 APESHIT 뮤직비디오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무명의 흑인 여성 아티스트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세계적 이슈가 되기도 했으며,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블랙 팬서, 그린 북 등 흑인 영화가 트로피들을 휩쓸어갔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촬영한 Beyonce & Jay Z의 뮤직비디오(출처: VEVO)



올해 아모리쇼 또한 그 물결에 합류해 흑인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가,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Pier 90의 아모리쇼 '포커스' 섹션에서는 아칸소주 벤튼 빌 미국 현대 미술관의 큐레이터 로렌 헤이든의 큐레이션 아래 모인 29개의 갤러리 대부분이 흑인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선보여 그들의 강렬한 색채와 정체성 탐구에 관한 단도직입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지난 7년간, 아모리쇼의 '포커스' 섹션은 한 대륙, 혹은 나라 중심의 갤러리 큐레이션으로 이루어졌었다. (노르딕 문화 중심의 2012년 쇼, 미국 중심의 2013년, 2014년 중국, 그리고 중동, 북 아프리카, 지중해 중심의 2015년 쇼) 그런 의미에서 올해 2019년 아모리쇼의 '포커스' 섹션이 여러 나라와 문화권을 아울러 흑인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선보인 다는 것은 지역주의적인 시각에서 탈피해 소수 인권에 주목, 흑인 문화를 재조명하고, 덕분에 신인 작가를 대거 발굴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Alex Gardner - Wrong Door out the Bathroom (2019) / Nate Lewis - Tomagraphonenetic (2019)
Zak Ové - Skateboard Boy / Ajarb Bernard Ategwa - Abeg 4 Change (2018)

그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한 아티스트 Zak Ové 는 트리니다드와 아이리쉬 혼혈로, 영국 식민지 지배 이후의 트리니다드와 아프리카 내전, 정치와 인종 문제에 깊이 파고드는 작가이다.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리니다드의 색깔을 보여주는 영화와 사진 작품으로 예술가 활동을 시작했고, 점점 회화와 조각까지 범위를 넓혀나갔다. 자동차 범퍼와 보닛으로 트리니다드의 전통 가면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제작하는가 하면, 스케이트 보드를 든 소년 조각상과 같이 해학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다문화 배경과 복잡한 내면을 표현했다.


여성 화가 군단

이번 아모리 쇼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도발적이고 담대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여성 화가 군단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호박'으로 익숙한 쿠사마 야요이, 예전에 한 포털사이트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마리나 아브라모빅 Marina Abramović (퍼포먼스 작품으로 관객과의 만남을 갖던 중 옛 연인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던 빨간 원피스의 여성 화가)을 포함,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제각각 다양한 개성을 보여준 여류 화가들이 대거 출연해 관객들의 공감대와 소통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 경험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거나 한 주제를 깊게 탐구하며,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여주였다. 또 한편으로는, 몇몇 여성작가들은 여성을 향한 사회의 불평등함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거나 정치적 상징물들을 차용하여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아모리쇼에서 다시 한번 중요한 메시지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Celia Paul 의 작품들. 왼쪽부터 Alice (2014), Sky, Sea Shore (2017), Self-Portrait, January (2018)


Marina Abramović 작가의 Carry Elvira (Facing Up), Woman Massaging Breast II - 억압된 여성성의 해방에 대해 다양하게 탐구한다
Pascale Marthine Tayou - Plastic Bags (2019) 개발도상국의 환경오염에 관한 주제로, 아모리쇼 플랫폼의 한가운데를 당당히 차지했다.


 

Stephanie Syjuco - Total Transparency Filter (Portrait of N)

그중 아모리쇼가 열리기 전 하이라이트 리뷰에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작가 Stephanie Syjuco는 샌프란시스코 출신 필리핀계 여성 작가로서 그녀의 사진을 통해 성 역할과 문화적 관념, 정치적 갈등에 대해 탐구한다. 이번 아모리쇼에서는 베일에 싸인 피사체를 촬영한 사진을 선보임으로써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강대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목을 끈 작가와 작품들


이번 아모리쇼는 다양한 시도들로 관객에게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보였다. 3일 내내 여러 유명한 작가와 소설가들을 초청해 팟캐스트를 생중계하는가 하면, 페이스 갤러리에서 인지도를 쌓은 화가 Leo Villareal의 작품을 위해 행사장 외부에 특별 전시장을 지어 그의 스페셜 프로젝트를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컴퓨터 코딩 기법과 LED 전구를 활용해 우연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패턴에 주목하는 작가다. 기존의 작품에서 벗어난 스케일로 별이 쏟아지는 터널을 걸어가면서 칠흑 같은 공간에서 관객이 작품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Leo Villareal - Special Project (2019)


한국 디자이너로서 아모리쇼를 돌아다니며 느꼈던 뿌듯한 순간이 여럿 있었는데, 그 이유는 외국 작가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한국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도호, 김민정, 곽훈, 안영일 여러 한국 작가가 참가해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절제미, 그리고 단색화 기법을 보여주었다.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와중에 어깨너머로 감탄사를 내뱉는 뉴요커들의 모습에 괜히 같은 한국인으로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서도호 - Alarm Keypad, Unit G5, 안영일 -  Water SQRW, 김민정 - Red Mountain


이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안영일 작가의 단색화 기법으로 제작된 Water SQRW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의 상단에 보이는 직선 구조가 바다의 수평선을 나타내는데, 푸른색의 페인트 칠들은 바닷물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빛의 모습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34년 개성에서 태어나 미국 LA에 자리잡기까지 아흔이 다 된 나이의 노장이 겪었을 삶의 굴곡이 절제된 붓터치에서 느껴지는 것이 기이하고도 신기했다.  



클로져

3월 10일 일요일, 3일간의 대장정을 뒤로하고 2019년 아모리쇼가 막을 내렸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모두들 제각각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많은 작가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다양한 작품과 예술적 시도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늘 아모리 쇼의 아쉬운 점은 갤러리의 큐레이션과 유저의 경험이 바이어와 셀레브리티의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만, 올해는 점점 더 많은 관객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개선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다양성과 소수 인권에 대해 포커스를 맞춘 이번 아모리쇼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도 남는다. 앞으로 미술계가 제시할 새로운 키워드가 무엇인지, 신진 작가들이 주목하는 주제가 어떤 식으로 풀이될 것인지, 내년, 그리고 내후년의 아모리쇼가 더욱더 기대된다.


전진, 앞으로 전진!


*언급된 사진들은 개인 촬영하였거나, Artsy.com, Hypoallergenic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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